지난 여름은 징글맞게도 더웠다. 어느 날 갑자기 밤이 가고 아침이 오더니 찬바람이 도적처럼 들이닥쳐서 또 추석이다. 티브이 속의 미남 미녀들이 한복을 차려입고, 사람들은 고향으로 가고 또 간다. 티브이 속의 추석은 언제나 농가 마당에서 빨간 고추가 익어가고 노인들이 송편을 빚으면서 도시에서 오는 자식들을 기다린다. 고향으로 가는 사람들아, 당신들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며 실개천이 옛이야기 지줄대는 곳인가. 지방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추석에는 고향에 갈 터인데, 티브이는 서울 사는 사람들이 고향에 가는 모습만을 거듭 보여준다. 그래서 추석 때 티브이를 보면 전국은 서울과 비서울로 나눠지는데, 서울은 타향이고 비서울은 고향이다. 내 고향 서울에도 추석은 왔는데, 서울은 이제 아무의 고향도 아니고 모든 타인들의 타향이다. 고향으로 가는 사람들아, 당신들의 고향도 만인의 타향이고, 당신들이 사는 자리가 당신들의 타향이라면 사람의 고향은 대체 어디인가.
나는 서울 사대문 안 토박이인데, 20년 전부터 경기도 고양시에 살고 있다. 추석에 나는 내 고향 서울 사대문 안으로 귀향한다. 나의 귀향은 초라하고 적막해서 남에게 이야기할 만한 것이 못 된다. 거기에는 뒷동산도 실개천도 없고 송편도 없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 나는 경복궁 창덕궁 선희궁터(지금의 국립 농학교 맹학교) 주변의 골목길이나 성북구 삼선동, 돈암동 쪽 한양 도성 둘레 마을들을 어슬렁거린다. 추석에 내 고향 서울은 문득 고요하다. 상점들이 문을 닫고 행인이 끊긴 빈 골목에서 길고양이들이 길바닥에 누워 기지개를 켜면서 하품을 한다. 나는 냄새를 탐색하는 개처럼 혼자서 그 빈 거리의 이 구석 저 구석을 들여다보다가 기억의 먼 끝에 남아 있는 흔적을 발견한다. 통인시장이나 금천교시장을 돌아다니다가 문을 연 식당을 겨우 만나면 국밥 한 그릇 먹고 돌아오는 것이 내 귀향의 전부다.
나는 이 동네에서 태어났고, 이승만 말기에서 박정희 초기에 이르는 난세에 이 골목에서 자랐다. 그때 나는 어렸지만 이 세상이 불의와 야만과 폭압에 가득 차 있다는 확실한 느낌을 생활 속에서 체득하고 있었다. 내 또래 동무들도 마찬가지였다.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다 알고 있다. 단어를 모를 뿐이다. 학교는 엄한 규율과 잔혹한 체벌로 아이들을 통제했지만, 아이들은 온 생명의 힘으로 반항했고 이탈했다. 학교는 아이들을 당할 수가 없었다. 그 시대의 가난과 억압 속에서, 나는 말 안 듣고, 학교 빼먹고, 선생님을 욕하고, 싸움하고 야단맞고, 매 맞으면서, 그리고 또 신명나게 싸지르면서 이 거리에서 놀았다.
무너진 성벽에서 아이들이 석전(石戰)을 벌였고
경복궁 마당에서 나는 또래들과
닭싸움 말타기 자치기
깡통차기를 하며 놀았다
그때 경복궁은 일제 때 헐리고
전쟁 때 그을린 모습 그대로의
폐허였다
경복궁,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 삼청동 숲과 한양 도성 언저리는 내 고향의 중요한 놀이터였다. 경복궁은 담장이 허술해서 아무 데로나 드나들었다. 경복궁 마당에서 나는 또래들과 닭싸움, 말타기, 자치기, 깡통차기를 하며 놀았다. 경무대를 지키는 순경들이 카빈총을 메고 북악산 올라가는 길을 지키고 있었지만, 아이들은 길이 없는 비탈을 따라 그 꼭대기까지 올라가 고함을 질러대서 순경들을 골 질렀다. 순경들이 기겁을 하고 호루라기를 불면서 쫓아왔지만 다람쥐 같은 아이들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때 경복궁은 일제 때 헐리고 전쟁 때 그을린 모습 그대로의 폐허였다. 전각이 있던 자리에 주춧돌만 남았고, 흩어진 석재 사이에 풀이 돋아나서 메뚜기들이 뛰었다. 남아 있는 전각의 아궁이 속은 어둡고 축축했다. 거기에 찬바람이 드나들었고 오래전에 식은 재 냄새가 났다.
9일 오후 서울 성북구 삼선동 한양성곽을 한 주민이 지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한양성곽도 동대문에서 낙산, 돈암동, 삼선동에 이르는 구간은 무너져 내린 돌무더기였다. 전쟁이 끝난 후 전국 농어촌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먹고살려고 서울로 올라와서, 그 돌무더기에 기대서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판잣집들은 화장실이 없어서 사람들은 무너진 성돌을 딛고 앉아서 똥을 누었다. 여름에는 돌무더기에서 파리 떼가 들끓었고 겨울에는 똥이 얼어서 빙벽을 이루었다. 성벽이 무너진 자리에는 크기가 베개만한 돌들이 널려 있었다. 내 어린 눈에도 그 돌들이 너무나 작아서 나는 나라를 슬퍼했다.
지금 경복궁 주변 서촌이나 북촌의 거리들은 강북의 명소로 꼽힌다. 오래된 한옥들은 세련된 실내 장식을 갖추고 와인바나 카페, 명품 가게로 바뀌었다(젠트리피케이션). 이 거리에서는 서까래가 드러난 천장 아래서 유복해 보이는 청춘 남녀들이 와인잔을 놓고 마주앉아 소곤대고 있지만 고향에 대한 나의 추억은 돌무더기로 남은 경복궁과 한양 도성의 폐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경복궁은 1592년 4월30일(음력) 새벽,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떠난 직후에 전소되었다. 창덕궁, 창경궁, 종묘도 이때 불타서 무너졌다(임진왜란). 이 화재는 서울 장안의 ‘간악한 백성들’이 저지른 방화라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임금이 버리고 떠난 대궐을 백성들이 몰려가 불 지르는 이 방화사건을 고등학교 국사시간에 배울 때 나는 발밑이 꺼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것이 내가 공 차는 놀이터에서 벌어진 비극이었다. 불길 속에서 아우성치는 내 고향 백성들의 환영에 지금도 나는 가위눌린다. 임금의 피난대열이 돈의문(서대문) 밖으로 나가는 시점에 3대 궁궐 안의 수많은 건축물에 동시에 불을 지르려면 미리 조직된 다수의 군중이 동원되어야 하고 거기에 지휘통제가 작동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서울을 내주고 떠나려는 묘당의 논의는 며칠 전부터 항간에 유포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유도대장이 폭민 몇 명을 붙잡아 목 베었으나 사태를 진압할 수는 없었다고 실록은 기록했다.
9일 오후 서울 성북구 삼선동에 고양이 한 마리가 한가롭게 누워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경복궁은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단을 거느리고 인의예지(仁義禮智)를 4대문에 배치하면서 도성을 남면한다. 이 구도 속에서 경복궁은 왕조의 관념적 상징이며 현실의 중심이다. 이 핵심부가 적군이 들이닥치기 이전에 성난 백성들의 방화로 잿더미가 되어버린 사태는 국가 권력의 정당성과 그 존재 이유에 대해서 무섭고도 근원적인 질문을 제기하고 있었지만, 압록강까지 도망갔다가 돌아온 임금과 권귀(權貴)들은 이 잿더미로부터 아무런 영감도 받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의 신념체계에 매몰되어 있었고, 이 전복적이고 근원부정적인 폐허의 심층을 성찰하지 못했다. 서울로 돌아온 조정이 이 방화사건을 수사해서 가담자를 처벌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냥, 덮어버린 모양이다.
경복궁의 폐허는 그 후 대원군에 의해 중창될 때까지 270여년 동안 도성의 한복판에 방치되어 있었다. 핵심부가 폐허인 도시가 내 고향의 모습이었고, 여기가 내 유년의 놀이터였다.
아이들은 그렇게 신명나게 놀면서
그 가난하고 짓밟힌
세월을 건너갔다
늙어서 맞는 추석날
옛 자리를 얼씬거리면서
그때의 놀이를 생각하는 일은 서글프다
경복궁 서쪽의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는 계곡이 깊고 숲이 그윽해서 도심 속의 별천지였는데, 여기에 노론 권귀의 유토피아가 형성되었다. 이 낙원에 재능 있는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격조 높은 담론과 시서화를 생산해냈고 조선 후기 진경문화와 위항문학은 이 동네를 중심으로 장관을 이루었다.
서울 종로구의 종로 09번 마을버스(수성동계곡↔숭례문)의 옥인동 쪽 종점의 이름은 ‘수성동계곡’이다. 겸재(謙齋)는 이 마을의 그윽한 골짜기와 빼어난 암석과 유산(遊山)하는 선비들을 그림으로 그려서 <수성동>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화폭 속에 보이는 돌다리 이름은 ‘기린교’인데, 이 돌다리가 기적처럼 아직도 제자리에 남아서 옛 풍류를 증명한다.
그런데 이 낙원에 둥지를 튼 권력자와 예술가들은 길 건너 경복궁의 폐허에 대해서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가. 추석날 내 고향의 빈 골목을 어슬렁거릴 때 이런 질문들이 나를 괴롭힌다.
한양성곽 줄기가 동대문을 지나 종로와 동숭동을 이으며 뻗어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기댈 수 있는 자료는 빈약하다. 경복궁이 소실된 지 160년쯤 후에 겸재는 무너져 버린 <경복궁>을 그렸다. 이 그림은 옥인동 쪽에서 바라본 구도인데, 영추문은 문루가 없어지고 기둥만 남아 있고, 기둥 사이는 돌로 쌓아서 출입을 차단했다. 경회루는 물이 말라 버린 연못가에 돌기둥만 남아 있다. 대궐 뒤뜰에 소나무가 우거져서 숲을 이루었고 버드나무가 늘어져서 땅에 닿을 듯하다. 겸재의 화폭 속에서, 무너진 것들은 아주 간략하게 처리되어 있고 그 비극을 쓰다듬는 시간과 자연의 힘이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대체로 이 낙원에 속하는 권력자 지식인 예술가 들은 길 건너 경복궁 폐허의 심층구조를 진지하게 성찰하지는 않았다.
이 폐허는 아무런 역사성도 부여받지 못했다. 단지 허무한 풍경으로 인식되어 일상에 자리잡거나, 옛 영화를 회고하는 영탄조 시문의 소재가 되거나, 세월이 지나서 숲이 우거지자 꽃구경 가는 풍류남아의 놀이터가 되었다. 나와 내 또래들은 여기서 공을 차며 놀았다. 영조는 경복궁의 폐허를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영조는 여기서 과거를 베풀었고 친히 모내기를 했고, 왕비를 보내서 누에를 치게 했다. 영조 48년은 1772년으로 임진왜란 이후 세 번째 맞는 임진년이었다. 이해를 기념해서 영조는 경복궁 폐허로 거동해서 명(明)의 마지막 황제 의종을 기리는 망배례를 올렸다. 청(淸)에게 사대의 조공을 보내면서 130년 전에 망한 옛 종주국 황제의 혼백을 향해 절을 하는 임금의 내면은 분열적이다. 임금은, 청과 명 양쪽을 모두 기웃거렸지만, 제 발밑의 폐허의 의미를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1948년 8월15일, 이승만은 이 자리에 축 처진 현수막을 걸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고, 나는 그해에 이 동네에서 태어났다.
9일 오후 서울 성북구 삼선동 한양성곽 아래 마을의 골목길 계단을 주민이 올라가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나는 소년시절의 한때 서울 성북구 삼선동, 돈암동, 성북동을 옮겨 다니면서 살았다. 낙산에서 삼선동으로 이어지는 한양 도성의 폐허는 내 또래 아이들의 신명나는 놀이터였다. 이 성벽에서부터 성북구청, 소방서 망루를 지나서 성신여대 앞까지가 내가 노는 구역이었다. 박완서 소설 <그 남자네 집>에 나오는 그 남자의 집이 성신여대 앞 동네라는 것은 한참 후에 알았다. 무너진 성벽에서 동네 아이들이 석전(石戰)을 벌였다. 아이들은 나무로 방패를 만들어서 머리를 가리고 잡석으로 돌팔매를 치며 싸웠다. 엄마들은 연탄집게를 휘두르며 못하게 했지만 말릴 수는 없었다. 무너진 성터에서 돌멩이는 얼마든지 있었다.
추석날에는 성벽의 돌을 모아서 동그랗게 불 터를 만들고 그 안에 헌 고무신짝, 베니어판, 썩은 가마니를 태워서 달맞이 불을 피웠다. 집에서 석유나 양초를 들고 나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옆 동네 아이들과 불 싸움이 벌어지면 땔감을 구하느라고 뛰어다녔다. 판잣집 담장을 뜯어 오거나 남의 집 빨래판, 개집을 집어 왔다. 아이들은 지쳐서 주저앉을 때까지, 날이 캄캄해질 때까지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놀았다. 밤중에 엄마들이 아이 이름을 부르며 찾으러 다녔다. 여러 엄마들 목소리 중에서 아이들은 제 엄마 목소리를 알아듣고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서울 서촌의 오래된 건물들 사이로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아이들은 그렇게 신명나게 놀면서 그 가난하고 짓밟힌 세월을 건너갔다. 아이들은 방목되었다. 아이들은 학교나 가정이나 사회의 보호가 아니라 오직 저 자신의 생명의 힘을 분출시키는 놀이의 힘으로 자랐다. 늙어서 맞는 추석날 그 옛 자리를 얼씬거리면서 그때의 놀이를 생각하는 일은 서글프다.
<그 남자네 집>과 내가 살던 집 사이에는 하천이 흘렀다. 더러운 물이 악취를 풍기면서 성북동에서 안암동 쪽으로 흘러갔다. 나는 중학교 때 이 물이 흘러서 어디로 가는지를 밝혀내려고 하류 쪽으로 하루 종일 걸었다. 이 하천은 한양대학교 뒤에서 중랑천과 합쳐지고 다시 흘러서 옥수동 근처에서 한강에 닿고 있었다. 나는 수계(水系)의 흐름을 몸으로 확인했다. 그날 나는 새벽에 나갔다가 밤중에 돌아왔는데, 이 도보탐사는 학교에서 대동여지도를 그려낸 고산자 김정호의 생애를 배우고 나서 그 놀라운 어른을 흉내 낸 것이었다.
왜 사람이 사람 사는 집을 부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 1592년의 경복궁 방화
2008년의 남대문 방화
2009년의 용산참사에서
불을 낸 사람들을 편들자는 것이 아니다
나는 법원의 판결에 시비를 걸자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다만 내 고향의 슬픔과 고통을 말하려 한다
여러 동네의 생활하수가 이 하천으로 모였고, 홍수 때 윗동네가 침수되면 재래식 변소가 넘쳐서 분뇨가 이 하천으로 떠내려왔다.
이 하천가, 지금의 돈암동 천주교회 건너편에 대중목욕탕이 있었다. 목욕탕은 때를 씻고 버리는 오수를 이 하천으로 내보냈다. 목욕탕 오수는 온기가 남아 있어서 김이 올랐다. 더운 물이 귀한 시절이었다. 겨울에는 손등이 터진 산동네 엄마들이 빨랫감을 이고 이 하천에 와서 목욕탕 오수가 나오는 구멍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 미지근한 오수에 옷을 빨았다. 이 하천의 이름은 성북천이다. 나는 정지용의 시 ‘향수’에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을 읽을 때마다 내 고향의 저 더러운 하천을 생각한다. 나는 박수근의 그림 <빨래터>를 볼 때마다 성북천 목욕탕 오수에 빨래하던 동네 엄마들, 시대의 엄마들을 생각한다. 그 엄마들을 생각하면 내 마음속에서 ‘엄마’는 거대한 군집명사로 떠오른다. 1·4 때 어린 3남매를 업고 끌고 서울서 부산까지 피난 열차를 타고 내려간 나의 엄마, 성북천 목욕탕 오수에서 빨래하던 동네 엄마들, 시대의 웅덩이에 몸을 갈아 바쳤던 모든 엄마들이 합쳐져서 내 고향의 ‘엄마’로 떠오른다. 그 엄마들은 이제 거의 세상을 떠나고 없다. 이번 추석에 다시 왔더니, 성북천은 이명박 청계천의 축소 모형으로 말쑥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물가에 물풀이 우거져 있고 하천 흐름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었다.
내 고향의 한양 도성 둘레에는 거대한 판자촌이 들어서 있었다. 내가 살던 동네는 이 마을보다 지대가 낮은 평지였다. 초기에 이 마을에 들어온 사람들은 땅을 파서 움막을 지었고, 판잣집, 하꼬방 들은 그 후에 들어섰다. 판잣집들은 사람들의 출신지를 따라서 고향별로 구획을 이루었다. 한 달에 두어 번씩 구청, 소방서, 경찰서, 그리고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건장한 사내들이 몰려와서 이 판자촌을 부수었다. 집들은 엉성해서 부수기가 쉬웠다. 오함마 두어 방이면 벽이 무너지고 지붕이 내려앉았다. 아기 업은 여자들이 울부짖으며 철거반원에게 달려들다가 머리채를 잡혀서 끌려갔다. 이 숨 막히는 구경거리에 동네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그것은 내 유년시절, 내 고향에서 벌어졌던 가장 무섭고 참혹한 삶의 모습이었다. 나는 왜 사람이 사람 사는 집을 부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엄마한테 물어봤더니, 엄마는 “너 그런 데 가지 마라. 딴 데 가서 놀아라”라고 말했다. 세상은 무섭고 난해했다.
9일 오후 서울 성북구 삼선동의 한양성곽에서 내려다본 서울 도심 풍경.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철거반원이 돌아가면 사람들은 부서진 자리로 돌아와서 잔해를 수습해서 다시 집을 지었다. 무너진 성터에는 조선 태조 때 모아온 돌들이 많아서 집 짓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에 다시 철거반이 들이닥쳐 까치집 같은 하꼬방을 부수었다. 짓고 또 부수는 일진일퇴가 수없이 반복되었다. 79년 이후 두 번에 걸친 불량주택 양성화 조처로 이 기나긴 전투는 끝났다. 오랜 통곡과 아우성이 멎은 자취를 따라서 마을의 외곽선이 형성되었다. 이번 추석에 다시 와 봤더니 골목들의 구조는 50여년 전과 같았는데, 마을은 지형지물에 맞게 정돈되어 있었다. 이 꼬불꼬불한 골목의 어떤 모퉁이에는 내 유년시절의 질감과 표정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고 마을은 고난에 찬 세월의 지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 그 가난했던 시절에 가난한 국가의 여러 기관들이 그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자리를 그토록 모질게 때려 부수어야 했던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고, 물어볼 곳도 없었다. 한국전쟁 이후에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이 마을에서 60여년에 가까운 주거를 이루고 있다. 마을을 전면철거하고 아파트를 짓는 재개발 방식을 따르지 않고, 이미 자리잡은 삶의 방식을 존중하면서 그 환경을 개선하는 방식으로 변모하였다(마을 재생). 이 마을에는 똑같은 집이 하나도 없다. 집들은 높낮이가 다르고 좌향이 제가끔이어서 마을은 들쭉날쭉하다. 이 세월의 지층 위에 자리잡은 사람들은 이제 떠나지 않는다. 그들은 이웃을 이루고 있었다. 복원된 성벽이 재생한 마을을 빙 돌아나가고, 저녁이 되면 내려앉는 해가 성벽에 걸려서 이 마을에는 어둠이 일찍 오고, 성벽 너머 도심의 차도에는 자동차 불빛이 용암처럼 흘러간다.
경복궁이 소실된 지 400여년 후에 내 고향 서울에서는 한양도성의 정문인 숭례문이 불타서 무너졌다. 2008년 2월10일에 설 연휴 기간이었는데, 고향에 갔던 사람들이 서울로 돌아와 보니 숭례문은 숯덩이가 되었고, 거기에 더운 김이 오르고 있었다. 숭례문에 불 지른 노인은 나와 같은 일산에 살던 사람이었다. 노인의 땅은 일산 신도시 아파트 건설을 위한 도시계획으로 수용되었다. 노인은 수용취소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다. 건설회사는 보상금을 공탁하고 노인의 집을 불도저로 밀었다. 노인은 구청, 시청, 여당, 야당, 신문사, 방송사,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청와대 비서실을 찾아가거나 진정서를 보내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정부의 토지 수용절차와 처분은 모두 적법했으므로 노인의 억울함은 성립될 수 없었다. 노인이 수용당한 땅의 현재와 미래의 가치, 그 땅과 집을 소유하고 거기에 사는 사람에게 귀속하는 생활적이고 정서적인 삶의 가치가 국가의 토지수용 절차에 의해서 온전히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법원과 정부는 법에 따라 판단하고 집행했고, 노인은 시너 통을 들고 남대문 문루 위로 올라갔다. 조선을 개국하는 그랜드 디자인의 맨 앞에 서 있던 숭례문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고, 지금 그 자리에는 복제품이 들어서서 휘황한 야간 조명을 받고 있다.
경복궁 서쪽 인왕산 성벽을 지켜보는 작가 김훈. 김영훈 안나푸르나 대표 제공
숭례문이 불타버린 그 다음해, 2009년 1월20일에는 용산 4지구 철거 현장(남일당)에서 세입자와 철거 병력이 충돌하면서 화재가 발생해서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 1명이 사망했다(용산참사). 이 사건의 재판은 개발구역에서 추방되는 세입자의 권리 문제나 경찰 진압작전의 적정성을 포괄적으로 판단하기보다는 최초 발화의 원인과 책임을 규명하는 쪽으로 전개되었다.
나는 지금 1592년의 경복궁 방화, 2008년의 남대문 방화, 2009년의 용산참사에서 불을 낸 사람들을 편들자는 것이 아니다. 나는 법원의 판결에 시비를 걸자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다만 내 고향의 슬픔과 고통을 말하려 한다. 용산참사의 재판 과정을 보면서 나는 내 유년시절, 성밑 마을 판자촌 철거 현장에서 울부짖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불타는 숭례문을 티브이에서 보면서 나는 1592년의 불길 속에서 갈팡질팡하던 서울 장안 사람들을 생각했다. 나의 이 연상작용은 비논리적이기는 하지만, 이 모든 사태는 국가와 개인, 지배와 피지배, 소유와 박탈, 추방과 저항의 적대관계에서 벌어진 쟁투가 극한에서 폭발한 참극이었다. 그리고 이 참극의 원형과 뿌리는 모두 내 고향의 한복판에서 비롯되었다. 다시 고향에 돌아와서, 나는 이 참극의 뿌리들이 발전적으로 해소되면서 오늘에 이른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그리고 고향으로 가는 당신들에게 묻고 있다.
정지용은 고향을 노래하면서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향수’, 1927)라고 노래했고, 몇 년 후에는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고향’, 1932)라고 노래했다. 추석에 내 고향의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면, 그 시 두 편이 동시에 떠오른다.
지금 경복궁은 말끔히 단장되어서 동화 속 나라처럼 아기자기하다.
한복을 입은 고운 소녀들이 깔깔대며 사진을 찍고 있고 젊은이들이 여기저기서 키스를 하고 있다.
김훈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