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발굴조사된 경주 서봉총을 공중에서 본 모습. 왼쪽 위 부분이 남분의 자취다. 타원 모양의 무덤 윤곽과 호석이 보인다.
남분 무덤 제사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 항아리의 파편들. 봉분 가의 호석열 앞에서 출토된 모습이다.
일제강점기에 금관이 나온 대표적인 신라 고분인데도, 발굴보고서가 나오지 않아 지금껏 얼개조차 제대로 몰랐던 무덤이 있다. 1926년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가 첫 발굴에 참여한 것으로도 유명한 경주시 노서동의 서봉총(노서동 129호분). 북분과 남분이 연이어 붙어있는 쌍분이란 사실만 알려졌던 이 무덤의 실체가 구스타프가 발굴한지 90년만에 드러났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 4월부터 재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서봉총 남분의 내부 얼개와 규모를 확인하는 성과를 올렸다고 5일 발표했다.
박물관 쪽이 밝힌 주요 성과는 4가지다. 우선 봉황 장식 금관이 출토된 북분을 먼저 만든 뒤 남분을 만들었고, 남분은 지금껏 알려졌던 원형이 아니라 타원형으로 북분의 절반 크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또 남분과 북분의 중심축을 잇는 방향이 확인됐고, 서봉총 봉토 주변에서는 무덤 제사의 흔적인 큰 토기항아리들도 출토됐다.
서봉총은 고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으로 일제강점기 북분과 남분을 따로따로 발굴했다. 1926년 일본 고고학자 고이즈미 아키오가 구스타프까지 발굴현장에 초대하며 조사를 벌인 북분은 5세기께 왕족여성의 무덤으로 보는 게 통설이다. 봉황모양 장식이 달린 금관과 고구려 연호로 추정되는 ‘연수원년신묘(延壽元年辛卯)’란 기년명을 새긴 대형 은제그릇이 나왔기 때문이다. 남분은 1929년 영국인 귀족 데이비드 퍼시벌의 자금 지원으로 조사를 벌인 까닭에 세간에서는 ‘데이비드총’이란 속칭으로도 부른다. 북분과 달리 주목할만한 유물은 별로 나오지 않았다. 남분과 북분 모두 조사자들이 도면과 보고서를 남기지 않아 두 무덤이 서로 어떻게 이어졌고 구체적인 얼개나 규모가 어느정도인지를 후대 학자들은 알 수 없었다.
90년만의 이번 재조사로 남분과 북분 호석(무덤 외부를 보호하려 두른 돌)의 이어진 상태가 드러나면서 남분의 축조 연대가 좀더 늦고, 그 크기도 북분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쌍분으로 알려진 국내 고분들 가운데 이처럼 한쪽 무덤은 크고 다른 한쪽은 훨씬 작은 양상의 모양새는 처음 확인되는 것이라고 한다. 박물관 쪽은 “남분의 크기와 형태를 정확히 몰라 북분보다 조금 작은 원형이라고만 추정해왔는데, 남분 크기가 북분보다 훨씬 작다는 것을 이번에 확인하면서 서봉총이 바로 옆 대릉원 일대의 다른 쌍분들과는 다른 양상의 고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고분 봉토 주변에서 제사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큰항아리들이 무더기로 발견된 점도 눈길을 끈다. 남분에서 9점, 북분에서 3점이 출토됐는데, 이는 지금까지 조사한 신라 능묘 중 가장 많은 수량이다. 고대 신라인의 매장 관념, 대형 고분을 쌓을 당시의 제사과정을 복원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는 자료다. 남분을 쌓을 때 북분의 호석뿐만 아니라 제사용 토기까지 파괴한 흔적이 드러난 사실도 이채로운데, 고신라 적석목곽분 연구의 중요한 논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박물관 쪽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제대로 조사하지 못했던 서봉총을 우리 손으로 조사해 구조, 규모와 축조 방식 등을 면밀히 파악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며 “내년에 북분까지 발굴조사한 뒤 서봉총 보고서를 완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