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스터 션샤인>(티브이엔)이 연일 화제이다. 400억 제작비에 걸맞은 수려한 화면이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시대적 배경과 인물 설정도 매력적이다. 그동안 구한말의 시대상을 입체적으로 그린 드라마는 거의 없었다. 영화에서는 <와이엠시에이(YMCA) 야구단> <그림자 살인> <가비> 등이 구한말의 혼종성을 그린 바 있지만, 드라마에서는 <명성황후>에서 자명종과 지구본을 만지작거리는 황후를 본 것이 전부이다. 가령 전깃불이 들어온 한성거리에 일본인과 서양인이 활보하고, 기존 신분질서가 붕괴된 사회상을 그린 드라마는 이번이 처음인 것이다.
드라마는 1871년 신미양요에서 출발하여, 현재 1902년을 다룬다. 그사이 일본에 의한 개항이 일어났고,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반발해 의병이 일어났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외교와 신문물 도입에 몰두하고, 일본과 러시아의 기싸움이 노골화되었다. 드라마는 첫 회부터 신미양요가 교과서의 한 줄짜리 사건이 아닌 처참한 전투였음을 보여준다. “패배가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단 한명의 탈영병도 없이” 싸우는 조선인들의 모습과, 포로로 끌려갈 백성들을 외면하는 흥선대원군의 모습, 그리고 적으로 싸웠으나 포로를 풀어주는 미군의 모습이 등장한다. 이는 드라마의 다층성을 맛보기로 보여준다. 즉 드라마는 망해가는 조선에서 항거하는 의병의 투쟁을 담을 테지만, 이를 ‘하나 된 조선이 외적과 싸운다’는 도식으로 단순화하지 않고 조선 내부의 지배와 피지배의 분열상을 담을 것이며, 미국과의 관계를 적이면서도 보편적 교감의 위치에 두겠다는 입장의 예고이다.
과연 드라마는 이 예고를 충실히 이행한다. 양반에게 맞아죽은 노비의 아들 유진(이병헌)이 미국으로 밀항하고 미군의 신분으로 조선에 돌아오는데, 여기에는 많은 의미가
겹쳐있다. 그에게 조선은 지켜야할 조국이 아니라 부모를 죽인 원수의 나라다. 미국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군인이 된 그가 어떤 입장으로 조선에 왔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드라마는 미
국-스페인 전투 장면을 재현한다. 한줄 자막이나 대사로 처리해도 될 것을 직접 보여준 까닭은 이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이 괌, 필리핀에 이어 조선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고, 그 전초 역할을 유진이 맡았음을 환기
하기 위함이다. “동지인 줄 알았으나 이방인이었다”라는 고애신(김태리)의 독백과 “양이의 앞잡이요?”란 질문에 “앞줄에 세워줄지는 아직 모르겠소”란 대답은 이러한 정황을 잘 말해준다. 미국은 1882년에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저버리고, 1905년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의 조선 지배에 동의한다. 동지인줄 알았으나 결국 적의 손을 들어주는 미국에 대해 드라마는 애매한 거리두기를 하면서, 그 간극을 고애신과의 로맨스로 메우려 한다.
노비보다 더한 천대를 받았던 백정의 아들 구동매(유연석) 역시 부모가 평민들에게 강간살해 당하는 것을 보고 도망쳐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는 일본낭인의 모습으로 조선에 돌아온다. 애초 그의 설정은 명성황후 시해와 관련이 있는 겐요사 소속이었으나, 친일 미화라는 시청자들의 항의에 부딪혀 허구의
조직원으로 바뀌었다. 억압받던 조선인이 일본 낭인이 되었다는 설정은 민족주의적 불편함을 안기지만, 친일 미화로 단정하긴 힘들다. 그의 전사가 친일 행위를 정당화하진 않기 때문이다. 과거 그를 구해준 고애신은 “백정이 아니라 백성”이라서 구해주었다고 말하며, 현재 그를 경멸하는 이유도 “백정이라서가 아니라 변절자이기 때문”이라 말한다. 이는 구동매에 대한 드라마의 가치판단을 잘 반영한다. 당시 이완익(김의성)으로 대표되는 지배계급 내부
의 친일세력이 존재한 것이나, 신분질서에 억눌린 이들이 민족을 절대적인 당위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신분차별이 강한 사회에서 민족적 동질감은 형성되기 어려우며, 민족주의는 신분질서가 타파된 근대국민국가에서 구성되고 발휘되는 이념이다.
드라마는
민족을 당위로 내세우지 않지만, 고애신의 존재를 통해 민족주의적 봉합을 꾀한다. 고애신은 신분제가 철폐된 뒤에도 여전히 존경받는 명문 사대부가의 ‘애기씨’이자 총을 든 의병이다. 그의 존재는 한말 의병의 구심에 조선의 지배세력이었던 사대부가 있었음을 환기한다. “오백년을 이어온 조선을 나만이라도 지키겠다”는 사명감을 지닌 인물이 남성이 아닌 여성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반가의 아녀자로 억압받던 존재가 시대적 각성을 통해 대의를 실현할 뿐 아니라, 근대적 로맨스의 주체로 성장하는 모습은 경이롭다. 이는 영화 <암살>이 여성 독립운동가의 존재를 환기하며 근대적 여성 주체의 탄생을 그렸던 미덕을 계승한 것이자, 영화 <덕혜옹주>가 어처구니없는 날조를 통해 조선 지배세력들에게 정통성을 만들어주려던 시도를 되살린 기획이다. 즉 드라마는 영화 <덕혜옹주>가 헛되이 꿈꾸었던 ‘조선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수립’을 완전한 허구의 인물인 고애신을 통해 달성한다.
‘애기씨’이자 의병인 이중생활자 고애신에게 이중의 과제가 달려 있다.
즉 조선의 지배세력을 근대국민국가 수립에 공이 있는 존재로 받아들이게 할 민족주의적 과제와 근대적 여성 주체의 형성이라는 여성주의적 과제가 달린 것이다. 그가 하려는 ‘벼슬보다 어렵다는 러브’가 어떤 모습일까. 가문의 정혼자를 친구로 삼겠다는 호방한 고애신에게 반가의 아녀자로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자유연애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고애신의 총구와 러브가 함께 뜨거워지길 진심으로 응원한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