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앙상블 불세출이 13일 오후 남강 동호정 앞 너럭바위에서 연주하는 것을 후원회 ‘불나비’ 회원들이 듣고 있다.
짱짱한 햇볕을 뿌리며 가을이 절정을 향해 호흡을 고르던 13일 오후, 남강이 굽이쳐 흐르는 경남 함양 동호정(東湖亭) 앞 너럭바위 ‘차일암’에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전우석의 거문고와 이준의 가야금이 속삭이는 듯 길을 트자 박제헌의 활대가 아쟁의 현을 그으며 애절한 소리를 터뜨렸다. 금적암(琴笛岩·악기를 연주하는 바위)이라고 새겨진 바위 위엔 박계전이 앉아 피리를 불었다. 김진욱의 대금이 바람처럼 흘러들고 김용하의 해금이 소리를 북돋우면 최덕렬의 징이 뒤를 받쳐주고 배정찬의 장구가 맥을 살렸다. 연주자들과 1m도 채 떨어지지 않은 바위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30여명의 관객들은 투명한 공기 속에 흩어지는 소리를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으려 주의를 기울였다. 피리에서 태평소로 악기를 바꾼 박계전이 커다란 탄식을 내지르듯 귀를 울리며 첫곡 <다스름>이 마침표를 찍었다.
연주자들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동기들이 모여 11년째 활동하고 있는 국악 앙상블 불세출(不世出)이었고, 전국 곳곳에서 산골짝까지 찾아온 열정적인 관객들은 불세출 후원회 ‘불나비’ 회원들이었다. 이어진 <달빛> 또한 야외무대와 어우러져 상상력을 자극했다. 어쿠스틱 기타의 다정한 소리가 밤공기처럼 깔리고, 생황이 달빛을 선율로 직조했으며 거문고가 나뭇잎 뚝뚝 떨어지는 것처럼 떨리는가 하면 피리는 풀벌레 우는 듯했고 대금은 한줄기 바람처럼 다가왔다. 해가 기울어 물소리가 높아지고 한기가 스며들자, 2시간 남짓 진행된 불세출의 공연은 실내에서 이어가기로 하고, 연주자와 관객들은 짐을 꾸려 함양 개평마을로 향했다.
불세출의 연주에 맞춰 소리꾼 강해림이 민요를 부르고 있다.
불세출과 불나비의 연결 고리는 함양 개평마을이라는 공간과 김태진·영진·지인 삼남매다. 삼남매의 아버지는 실천적 지식인의 삶을 온몸으로 입증한 고 김진균(1937~2004)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이고, 어머니 정혜영은 함양 출신인 조선 중기 석학인 일두 정여창(1450~1504년)의 후손. 특히 정여창이 살았던 터에 후손들이 다시 지은 일두고택은 선비의 꼿꼿한 기개가 스며있는 아름다운 고택으로 꼽혀 <토지> 등 다수의 사극 드라마를 비롯해 최근엔 <미스터 션샤인>이 촬영된 곳이다. 어릴 적부터 외가를 드나들며 한옥마을의 아름다움을 자연스럽게 익혔던 세 남매는 나이가 들면서 개평마을에 더욱 빠져들었다.
지난달 개평 한옥마을에 문을 연 ‘지인공간’. 북카페와 출판사, 불세출 후원회를 겸한 공간이다.
‘도서출판 지인’ 대표인 막내는 일두고택과 가까운 민가를 사들여 지난달 북카페 ‘지인공간’을 열어 개평마을에 눌러앉았다. 둘째인 김영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사무처장도 마을 끝자락에 작은 집을 마련했다. 세남매는 우연히 알게 된 젊은 국악인 그룹인 불세출을 유교문화활성화지원사업에 추천했는데, 2016년 불세출은 처음으로 일두고택 대청마루에서 연주회를 열었으며, 그 공연에 감동 받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후원회를 조직했다. 이때문에 북카페 지인공간의 표지판엔 ‘도서출판 지인’과 함께 ‘불세출 후원회 불나비’가 적혀 있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지인공간-불나비-불세출의 인연은 수백년의 시간이 쌓여 맺어진 셈이다.
지인공간에 꾸려진 ‘청정서실’에서 고 김진균 교수의 둘째 아들 영진씨가 아버지의 저작집 ‘불나비처럼’을 들어보이고 있다.
불세출-불나비 뒤풀이가 열린 지인공간은 5칸짜리 현대식 한옥인데 건축적 모티브를 일두고택에서 따왔다고 한다. ㄱ자형의 일두고택 사랑채는 누마루 탁청재(濯淸齋)가 사랑방·대청보다 약간 높게 지어졌는데, 설계를 맡은 서정일 건축학 박사와 정봉찬 이담건축 소장은 이를 응용해 지인공간 한 칸을 나머지 네칸보다 조금 높게 올려 2개층으로 나눴다. 시공은 삼남매의 친척인 김철민 대목장이 담당했다. 아래층은 아버지 김진균 교수가 보던 책과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지은 책 등을 놓아 청정서실(菁丁書室)을 꾸몄고, 위층 누마루는 공연공간·카페 등으로 활용되는 좌식용 다목적공간으로 뒀다. ‘청정’은 김진균 교수가 활동하던 다산연구회 동료들이 지어준 호로, 무우밭의 장정·진주출신의 장사 등 여러 해석이 분분한데 김진균 교수는 정년퇴임 뒤 과천에 ‘청정서실’이라는 연구실을 내고 매일 출근했었다. “사회운동을 이론만이 아니라 실천으로 살아가신 고 김진균 선생님께 바칩니다”라고 적은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저서를 들춰보는 김영진 사무처장의 코가 잠시 빨개졌다. “처음엔 청정서실을 조금 더 크게 만들까도 했지만, 이제 김진균기념사업회도 10년 활동을 담은 백서를 마치고 해산했기에 조촐하게 기억하는 공간을 만들자고 가족들이 의견을 모았어요.”
일두고택 사랑채. 누마루 탁청재가 사랑방보다 단이 높게 지어졌다.
밤이 깊어올 때 불세출은 차일암에서 못다한 공연을 이어갔다. 청정서실 위층 누마루의 문을 활짝 열자 마치 극장 무대처럼 변했다. 현의 합주곡이라고 하여 <시르실>이라고 이름붙여진 최덕렬의 창작곡이 해금, 기타, 거문고로 엮였다. 불세출의 김용하 대표는 “국악 연주는 고택에서 할 때 소리가 참 좋게 들리는데 그 이유는 한옥 마루 밑이 비어 있어 악기의 나무 몸통에서 나는 소리가 공명하면서 소리를 풍부하게 품어올리기 때문”이라며 “지인공간 누마루도 아래층이 받쳐줘서인지 음향이 만족스러웠다”고 말했다.
새로운 사회과학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제도권 학풍’에 맞선 제자들을 항상 너른 품으로 안아줬던 김진균 교수의 삶처럼, 지인공간의 청정서실은 ‘세상에 없는 소리를 해보자’며 고군분투해온 젊은 국악인들의 소리를 큰 울림으로 받아주고 있었다.
함양/글·사진 이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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