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자 화실’이란 간판이 붙어 있는 옛 화신연쇄점.
‘더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 와서/동백꽃처럼 타오르다/슬프게 시들어 버리는 곳/항상 술을 마시고 싶은 곳이다/잘못 살아온 반생이 생각나고/헤어진 사람이 생각나고/배신과 실패가/갑자기 나를 울고 싶게 만드는 곳/문득 휘파람을 불고 싶은 곳이다…’
문병란 시인의 시 ‘목포’의 서두는 애절하면서도 통렬하다. 일제강점기의 영화를 뒤로 한 채 해방 뒤 퇴락을 거듭해온 남도 항구 목포의 비운을 감성적으로 담은 시다. 특히 목포의 공간들 가운데서도 유달산 자락과 포구선창 사이에 가로놓인 원도심 근대거리의 운명을 이 서두의 싯구만큼 절절하게 풀어낸 글도 없을 성 싶다. 지녔던 가치와 재부를 대부분 잃고 주저앉은 채 허송세월을 보냈던 이 동네의 운명과 상통하는 까닭이다.
목포 원도심 골목길로 접어들면 눈에 띄는 일본식 목조가옥들.
목포 유달동, 만호동 일대의 원도심 근대거리는 일제강점기 조선 4대 항구이자 6대 도시였던 목포를 대표하는 번화가다. 해방 뒤 일본 중국과의 교역이 끊기면서 퇴락을 거듭해오며 방치됐던 음울한 거리였다. 그러다 2017년 도시재생뉴딜 사업의 적지로 지목되어 수백억대로 추산되는 재생예산투입 계획이 나왔고, 지난해 옛 화신연쇄점 건물 등 근대건축물 15곳과 거리 경관 자체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급기야 지난달 손혜원 의원이 옛 적산가옥을 매집하며 투기를 벌였다는 의혹이 제기된 이래 숱한 논란이 벌어지면서 이제는 문화유산 이상의 눈길을 끌어모으는 핫스팟이 됐다. 손 의원과 인척이 산 창성장 등의 여관건물과 그가 나전칠기박물관이 들어설 곳이라고 소개하며 기자회견을 벌인 옛 창고 건물은 외지인들의 단골 관람지로 떠올랐고, 부근에 임시관광안내소까지 개설됐다.
사실 문화재계에서 목포 원도심 근대유산지구는 1990년대 이후 20여년간 각별한 시선을 받아왔던 곳이다. 시가지 재개발로 건물이 뜯겨나가고 도심경관이 관광을 위한 영화세트장처럼 개조되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은 국내 유일한 근대 도심 지대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수군기지가 들어섰던 포구 근처 도심 언덕인 목포진을 중심으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바다를 매립한 터에 들어선 근대 시가지와 일본인들의 거주지는 지금까지 그 원형을 별다른 손상없이 유지해왔다. 해방 뒤 대일본 교역이 끊긴 목포가 국토 재개발과 경기 부양 계획에서 소외돼 개발 가치가 정체상태에 머물렀던 것이 요인이었다. 목포 근대유산이 거의 개발의 때를 타지 않았다는 점은 지역 문화유산의 재생과 도시계획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을 낳는 배경이기도 하다. 지난 26일 목포 원도심 현장에서 만난 김지민 목포대 건축학과 교수(문화재위원)는 타임캡슐처럼 보존된 원형 공간의 가치를 강조했다.
“목포 원도심은 외지인을 의식해 세트장화되지않았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지닌다. 개발가치가 없어 소외된 것은 저주로도 비쳤지만, 도시의 역사문화가 도시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가치로 부각된 2000년대 이후에는 근대 공간과 생활사를 온전하게 간직한 보고로서 주목받게 됐다. 이제 누가 주체가 되어 어떻게 이 지역의 경관과 가치를 살려나갈 것인지가 과제로 남았다.”
실제로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해안로, 번화로 주변의 옛 도심 근대유산 건축물들은 건축양식은 물론이고, 숱한 옛 이야기들을 품고 있었다. 해안로 249번지 사거리에 있는 옛 화신연쇄점 안은 바로크풍의 기둥장식이 보이는 2층 난간에 일본 다케우치사가 일제강점기 제작한 철제 금고가 원래 모습 그대로 있었다. 해방 이전에는 민족자본이던 화신백화점 운영진이 현찰을 넣어두었고, 해방 뒤에는 조선통운 대한통운이 쓰면서 목포 경제를 움직인 숱한 자금들이 융통되던 과거의 사연들을 여실히 떠올리게 했다. 지금은 문예협동조합이 들어서 목포 문화인들의 공간으로 쓰이고 있는 마치야(2층 일식상가) 구조의 옛 동아부인상회 건물도 2층 테라스에 올라가서 보니 멀리 역사공원이 들어선 만호진 언덕을 배경으로 일제 가옥·상가들이 줄줄이 펼쳐져있었다.
옛 화신연쇄점 건물 2층에 방치된 일본 다케우치사의 대형철제금고. 일제강점기 때부터 쓰던 것이다.
근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목포 도심 역사경관 구역 말고도 외곽 온금동과 북교동엔 일제강점기 애환을 간직한 숱한 조선인 달동네 마을 흔적이 자리하고 있다. 1897년 고종황제의 칙령으로 개항한 뒤 목포는 서구 열강의 국제 거류지 설정과 한일병합 뒤 일본인들에 의한 근대도시 재개발로 인해, 조선인 주민들은 도시 북쪽과 서쪽 유달산 자락에 토막과 달동네를 꾸려야 했다. 역시 근대문화재로 일부가 지정된 온금동 조선내화공장터를 둘러싼 유달산 암벽 아래의 달동네는 ‘다순구미’라고 불렸던 조선인촌의 유산들이다. 서울·인천 등 다른 도시에서는 사라진 계단집, 일본식 가옥의 미닫이, 목재 방범틀이 조선 특유의 초가양식과 어우러진 색다른 서민 주거들이 그대로 살아있는 것이다.
26일 오후 답사를 위해 들른 온금동 다순구미 마을의 고샅길은 멀리 고하도 아래 바다에 비춘 눈부신 햇살 아래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경제논리가 아니라 지역의 역사 문화적 가치를 품에 안고 지속될 수 있는 도시개발의 새로운 방식과 주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목포/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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