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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모자 쓴 남자의 얼굴을 그늘 속에 가린 의도

등록 2020-07-25 15:03수정 2020-09-02 18:47

[토요판]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39. 피터르 더 호흐, ‘술 마시는 여인’

남성이 누구냐 사건의 향방 좌우
책임과 비난은 성폭력 피해자 몫

17세기 네덜란드 그림들도
술 취한 여성에 책임 돌리는 묘사
바느질로 외면할 뿐 거절 어려워
피터르 더 호흐, <술 마시는 여인>, 1658년, 캔버스에 유채, 파리 루브르박물관.
피터르 더 호흐, <술 마시는 여인>, 1658년, 캔버스에 유채, 파리 루브르박물관.

“‘성추행 혐의’로 고소된, 64세 박모씨가 숨졌다.”

얼마 전 ‘서울시장’이란 직함을 철저히 배제한 채 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과 성추행 의혹을 보도한 한 매체의 기사가 화제가 됐다.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자’는 원칙을 해당 보도에도 적용한 것이다. 개인사와 업적에만 맞춰졌던 보도 초점에서 벗어나니 그제야 성추행 의혹과 피해자의 모습이 선명히 드러난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런 평가에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애초 숨진 가해자가 서울시장이 아니라 64살 자영업자 박아무개씨였다면 기사가 났을까? 가해자 서사가 없었다면 피해 사실이 이 정도로 주목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남성 가부장 사회에서 성폭력 사건 해결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피해 사실의 확증 유무보다는 가해 남성이 누구인가에 따라 사건의 경중과 향방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가해 남성의 힘과 권력이 막강할수록 성폭력이 발생한 책임과 비난은 피해자에게 집중되어, 결국 해결 없이 흐지부지되는 경우도 참 흔했다. 이를 방증하듯 이번에도 ‘왜 바로 항의하지 않았나’, ‘미니스커트로 유혹했다’는 말이 어김없이 등장했다. 이처럼 성폭력을 남성 편에서 해석해온 역사는 아주 오래되어, 서양미술에서도 ‘성폭력의 희생자’가 되는 상황을 여성이 자초한 것으로 묘사하는 작품이 적지 않게 나왔다. 네덜란드의 남성 화가 피터르 더 호흐(1629~1684)가 그린 <술 마시는 여인>도 그중 하나다.

술 권한 남성 아닌 취한 여성에 초점

그림 한가운데 붉은 치마를 입은 젊은 여인이 술잔을 든 채 의자에 ‘방만하게’ 앉아 있다. 양 볼이 발그스름한 것으로 보아 여인은 이미 크게 취한 듯하다. 얼마나 마셨는지, 눈은 풀려 있고 다리는 힘없이 쭉 뻗은 상태고 왼쪽 팔도 늘어져 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것 같은데, 그것도 부족한지 검은 옷의 남성은 젊은 여인에게 다음 잔을 따르고 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서 있는 나이 든 여성의 불안한 표정과는 대조적으로,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창문을 등지고 앉은 남성은 담배를 피우며 이 광경을 여유롭게 지켜보는 중이다. 모자 쓴 남성과 술 취한 여성 사이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작품 오른쪽 벽에 걸린 그림이 답을 암시한다.

피터르 더 호흐, &lt;술 마시는 여인&gt; 부분.
피터르 더 호흐, <술 마시는 여인> 부분.

오른쪽 벽에 걸린 그림에는 성경 요한복음 8장에 등장하는 간음한 여인과 예수가 묘사돼 있다. 간음하다가 율법학자에게 잡힌 여성을 보고 예수가 몸을 굽혀 땅에 무언가를 쓴 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했다는 내용이다. 그림은 린치를 가하려 기세등등했던 사람들이 예수의 이 말에 조용히 물러나기 직전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가 간음한 여인에게 “다시는 죄짓지 마라”고 당부하며 이야기는 마무리되는데, 하필 이 일화가 그림 속 벽에 걸린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술 마시는 여인> 속 주인공도 곧 예수에게 용서를 받아야 할 운명에 처하게 된다는 복선이다.

그래서인지 <술 마시는 여인>의 초점도 취한 여성에게 집중돼 있다. 반면 모자 쓴 남자의 얼굴은 의도적으로 그늘 속에 가려져 있다. 이는 앞으로 일어날 일의 책임이 남자가 아닌 여자에게 있음을 시사하는 장치다. 즉 화가는 여성이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스스로를 위험에 노출시켰으며, 취함으로써 자기 통제력마저 상실했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여성이 술을 안 마셨더라면, 모든 게 괜찮았을까? 만약 남성만 술을 마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공교롭게도 피터르 더 호흐와 동시대에 네덜란드에서 활동한 여성 화가 유디트 레이스터르(1609~1660)의 작품에서 그 궁금증을 풀 수 있다. 레이스터르의 1631년 작 <제안>을 보자.

유디트 레이스터르, &lt;제안&gt;, 1631년, 패널에 유채, 헤이그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유디트 레이스터르, <제안>, 1631년, 패널에 유채, 헤이그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이미 몇 잔 걸치고 온 듯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남자가 하얀 블라우스의 여성 옆에 바짝 붙어서 집요하게 추근댄다. 남자는 한쪽 손으로 여성의 어깨를 만지면서, 동전을 잔뜩 쥔 다른 쪽 손을 여성에게 내밀고 있다. 여성의 표정에서 당혹감, 수치심, 불쾌감이 스치지만, 여성은 일절 반응하지 않고 남성의 시선을 무시하고 있다. 레이스터르는 여성이기에,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음침한 분위기가 무얼 뜻하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레이스터르는 여성을 완강히 바느질에 집중하는 모습으로 그렸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여성의 바느질은 정숙함을 의미하는 행위였다. 레이스터르는 바느질하는 여성의 편에 서서, 그림 속 남성의 행위를 성추행으로 규정한 셈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장면을 누군가(남자)가 실제로 보았다면, 이 여성의 평판은 심각하게 손상됐을 것이다. 어쨌든 남이 보기에 어깨 위에 놓인 남자의 손을 떨치지 않으니 거부 의사가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왜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했을까? 이유는 현대 남성들이 직장 상사에게 ‘술 안 먹겠다’, ‘야근하기 싫다’는 말을 못하는 것과 똑같다. 그림 속 남성의 모피 모자는 부를 암시한다. 그와 반대로 소박한 차림의 여성은 사회적으로나 계급적으로나 이 남성보다 열등한 위치에 놓여 있다. 여성의 침묵은 남성의 추행에 대한 암묵적 동의가 아니라 사회적 억압의 결과인 셈이다. 행여나 침묵하지 않고 성추행 혐의로 남성을 고소하더라도 여성은 좌절할 확률이 높다. 남성의 불콰한 얼굴이 법원에서 고려될 것이기 때문이다. 남성 중심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의 음주는 성폭력을 자초한 비난거리가 되지만 남성의 음주는 관용의 대상이라는 건 공공연한 사실 아닌가.

17세기에서 한 치도 못 나아간 오늘

‘끈끈한 남성연대’의 존재는 선배 남성이 사회 초년생 후배 남성에게 건네는 다음과 같은 충고에서도 확인된다. “앞으로 세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 술 조심, 노름 조심, 여자 조심.” 이 나열 안에서 여성은 인격체라기보다 술, 노름과 더불어 남성의 앞길을 망치는 하나의 사물, 유혹, 함정으로 자리할 뿐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여성에게 남성은 어떤 존재일까. 리베카 솔닛의 책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물론 모든 남자가 다 여성 혐오자나 강간범은 아니다. 그러나 요점은 그게 아니다. 요점은 모든 여자는 다 그런 남자를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는 점이다.” 그렇다. 가해자가 되지 않기를 선택할 수 있는 남성의 입장과 피해자가 되지 않기를 선택할 수 없는 여성의 입장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성폭력 가해자가 하필 훌륭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고 앞날이 창창한 사람이면, 즉시 피해자가 꽃뱀으로 몰리는 판국에 말이다. 오히려 그토록 성 인지적 관점이 부족했던 사람이 잘나갔던 사회가 어딘가 단단히 망가져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 더욱 치열하게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조적인 젠더 권력 문제를 단순한 개인의 스캔들로 축소하는 발언만 여전히 만연한 것을 보면 우리 사회는 아직 멀었다. 어떻게 17세기 네덜란드 그림에서 한 치도 못 나아간 걸까.

▶이유리 작가. <화가의 출세작> <화가의 마지막 그림> 등 예술 분야의 책을 썼다. ‘여자 사람’으로서 세상과 부딪치며 깨달았던 것들, 두 딸을 키우는 엄마로 살면서 느꼈던 감정과 소회를 그림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풀어본다. 아울러 미술사에서 지워진 여성들을 호출해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 sempre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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