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현지시각) 제93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탄 윤여정(왼쪽)이 남우조연상을 받은 대니얼 컬루야(가운데), 여우주연상을 탄 프랜시스 맥도먼드(오른쪽)와 함께 수상을 기뻐하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로이터 연합뉴스
90년 넘게 이어온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도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영역은 여럿 남아 있었다. 25일(현지시각)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팬데믹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최초의 시도와, 팬데믹으로 심화한 인종차별을 벗어나고자 하는 ‘변화’와 ‘다양성’의 최초 기록이 어우러진 모습이었다.
이날 시상식은 시작 전부터 전염병 때문에 최초로 일정이 연기되는 기록을 세워놓은 상태였다. 코로나19 사태를 미리 예언이라도 한 것 같은 재난영화 <컨테이젼>을 만든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이 시상식 연출을 맡아 일찌감치 관심을 모았다. 소더버그 감독은 영화 촬영 때 조언을 받았던 전염병 전문가들에게 코로나19 방역과 관련한 자문을 구했으며, 이번 시상식 전체 예산에서 방역 관련 항목이 3번째 규모를 차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상식 역사상 최초로 극장이나 호텔이 아닌 기차역을 무대로 삼은 것도 코로나19 영향이었다. 이날 시상식은 오후 5시(현지시각)부터 3시간 동안 미국 로스엔젤레스의 유니언 스테이션과 할리우드 돌비극장에서 이원 중계로 진행됐다. 폐쇄된 극장이 아니라 야외와 연결되는 기차역이 방역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문을 연 유니언 스테이션은 아르데코와 스페인 식민시대 건축 양식이 섞인 로스앤젤레스의 명소로, <블레이드 러너> <스피드> 등 수많은 영화에 등장한 바 있다. 해질녘 자연광과 각 탁자 위에 놓인 전등이 시상식 분위기를 아늑하게 만들었다. 소더버그 감독과 디자이너 데이비드 록웰은 외신 인터뷰에서 이번 시상식을 “텔레비전 쇼가 아닌 영화처럼 보이도록 할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시상식은 코로나19로 어려워진 영화계를 의식한듯 축제 분위기를 걷어내고 영화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원래 45초로 제한된 수상소감 시간을 90초로 늘렸다.
팬데믹과 함께 시상식의 열쇳말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다양성’이다. 올해 시상식의 역사는 아시아 여성으로서 63년 만에 연기상을 받은 배우 윤여정과 함께, 아시아 여성 최초로 감독상을 받은 클로이 자오 감독(<노마드랜드>)이 다시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수상은 못 했지만, 스티븐 연(<미나리>)이 아시아계 미국인 최초로, 리즈 아메드(<사운드 오브 메탈>)가 무슬림 최초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아카데미는 수십년 동안 ‘백인·남성만의 리그’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인사이더>가 지난 10년 동안 주요 부문 후보·수상작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후보자의 89.1%가 백인이었으며, 수상자의 79.1%가 백인이었다. 또한 같은 기간 후보자의 71.1%, 수상자의 77.4%가 남성이었다. 2015년 에스엔에스(SNS)에서 벌어진 “오스카는 너무 하얗다”(#OscasSoWhite) 해시태그 운동, 일부 배우의 참여 거부 등을 거치면서 매년 꾸준히 변화 노력을 해왔다.
특히 지난해 작품상·감독상·각본상·국제영화상 등 4관왕을 차지한 영화 <기생충>은 아카데미 변화의 중요한 분수령이 됐다. 비영어권 영화가 아카데미 최고 영예인 작품상과 감독상을 다 가져간 건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봉준호 감독은 올해 시상식에 감독상 시상자로 다시 등장하며 눈길을 끌었다.
다양성을 향한 아카데미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올해 주요 부문 여성 후보자 수는 2018년 최고 기록인 23명을 앞선 24명을 기록했지만, 남성 후보자의 절반에 불과했다. 아카데미는 지난해 여성, 소수인종·민족, 성소수자, 장애인 등이 영화 제작과 홍보, 배급 등 전 과정에 비중있게 참여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다양성 기준’을 발표했다. 이 기준은 2025년 시상식부터 반영하기로 했다.
김효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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