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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차라리 왕을 웃길 때가 부러워라 ‘21세기 남사당패’ 피디의 숙명

등록 2006-05-17 19:49수정 2006-05-18 23:21

지금은 방송중
영화 〈왕의 남자〉를 마치 〈뿌리〉라는 드라마를 보는 흑인이 된 심정으로 봤던 이유는 ‘쇼’를 만드는 사람들의 얘기였기 때문이었다. “왕이 보고 웃으면 되는 것 아니오”라는 장생의 일갈을 들으며, 만드는 사람이 울고 있어도 보는 사람이 웃으면 희극이 되는 광대 짓을 결국 수백 년 지난 지금 똑같이 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우울해졌다. 게다가 왕의 웃음 하나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라니 이런. 그래도 예전이 나았다.

주권이 국민에게 이양된 요즘, 쇼 혹은 방송의 주인은 관객 그리고 시청자다. 왕의 웃음과 삐침(?)은 다음날 시청률이라는 살벌한 숫자로 바뀌어서 칼처럼 무겁게 목을 죄어 온다. 반응이 바로 보이면 체념이라도 할 텐데, 열린 궁궐이 ‘안방극장’으로 바뀐 지금, 얼굴 가린 군주의 서슬 퍼런 어명은 술김에 긁어댄 카드 월말 청구서만큼이나 공포로 다가온다.

예쁜 남자의 허연 뱃살만 보여주면 침 흘리는 군주라면 차라리 귀여웠다. 재주를 잘 넘는 것보다 누가 재주를 넘는가가 더 중요해지면서, ‘동방’에서 온 ‘신기’한 다섯 명의 사도를 향해 흔드는 빨간 풍선을 얼마나 모을 수 있는가가 최고 피디의 동의어이며, ‘비’를 섭외하는 것보다 외줄을 타다 다섯 번 텀블링 하는 것이 더 쉬운 시대가 돼버렸다. 게다가 올해는 축구까지 말썽이다.

지구 자전 속도의 절묘한 조화인지, 아니면 대한민국 쇼 피디들을 괴롭히려는 피파(FIFA)의 음모인지 모르겠지만, 월드컵 우리나라와 토고전은 말 그대로 공포의 날이다. 예선전 중 유일하게 밤 10시에 경기를 한다는 것 때문에 판을 벌일 수 있는 모든 장소는 쟁탈전, ‘공길’은커녕 ‘육갑’만으로도 어떻게 해볼라 쳐도 이게 영 만만치가 않다.

그날 한 인디밴드에게 들어온 출연 제의만 스무 곳이고 그중 고르고 골라 여섯 곳을 하기로 했단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 빠질 수 없는 게 풍악인데, 왕인 시청자들이 울리라면 울려야 하는 것이 21세기 남사당패 우두머리인 피디의 숙명이라니 야속할 따름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전화를 돌리고 또 돌린다. 근데 진짜 걱정은 이게 아니다.

시장 보는 아주머니도 “180의 큰 키로”라며 상대방 스트라이커까지 분석이 끝난 이런 난리 통에, 경기 결과가 만에 하나, 아니 일억분의 하나로 진다면…. 생각하기도 싫다. 어머니 잃은 아들보다 더 실망할 관객들과 시청자들 대상으로 울릴 풍악이 뭐가 있단 말인가. 하여간, 고수레.

장생은 연산이 쏘는 활을 피해 줄을 탔지만 쇼 피디들은 멀리 독일에서 토고 축구선수들이 쏘는 활 또한 기도하면서 피해야 한다. 태극전사 여러분들 그리고 벽안의 감독님, 제발 살려주시길 바란다. 근데, 마지막으로 간첩 같은 질문 하나. 도대체 공 차는 것에 이렇게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걸까? 다시 한 번 고수레.


이문혁/씨제이미디어 기획특집팀 피디


‘지금은 방송중’은 방송 작가, 피디 등이 현장에서 일어나는 재미있는 이야기, 제작방식이나 프로그램의 변화경향 등을 생생하게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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