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방송 <지식채널e> 매일 밤 8시50분 방송.
TV 보는 남자
리모컨은 나를 안절부절못 하게 만든다. 드라마 50분은 너무 길다. 주인공들이 약간이라도 답답하게 굴면 얼른 다른 드라마로 돌려버리고 결말은 팬 사이트에서 확인한다. 야구 중계 1이닝도 지겹다. 투수가 의미 없는 견제구를 던지면 나는 주자보다 빠른 반응 속도로 딴 채널로 뛰고 만다. 영화는 토막토막 보게 되니, 열 번 정도 재방송을 하면 전체를 머릿속에서 재구성할 수 있다. 티브이는 롤러코스터, 채널들은 단말마도 없이 사라져 간다.
신기하다. 이런 나도 요즘 티브이에서 적지 않은 지식들을 배우고 있다. 이소룡은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했는데, 그의 지도교수는 “너같이 질문을 좋아하는 사람은 철학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만약 외계인이 지구에 도착하면 겉모습에 속지 않고 개미들에게 가장 먼저 말을 걸 거라고 한다. 세계 최대 조립식 가구 이케아의 창업주는 엄청난 짠돌이지만, 직원들에게 ‘실수 면허장’을 공평히 나누어주는 대범한 사업가라고 한다. 나는 이 모든 걸 교육방송 ‘지식채널 e(이)’ 시리즈를 통해 배웠다.
감각적인 엑기스 다큐멘터리라고 해야 하나? 쫄깃쫄깃한 지식 광고라고 하는 게 좋을까? 뮤직 비디오 스타일의 강의라고 불러 볼까? 아무튼 불과 4~5분의 짧은 영상인 ‘지식채널 e’는 광고나 영화 예고편처럼 재빨리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고 호기심의 끈을 잡아당긴다. 교육방송이라면 당연하다고 여겼던 구태의연함을 훌훌 벗어던지고 있다.
인상적인 영상, 몇 자의 강렬한 자막, 효과적인 음악으로 이루어진 담백한 구성이지만, 세심하고 다채롭게 시도된 연출이 상쾌하다. 〈스타워즈〉의 도입부를 연상시키는 자막으로 지난 회를 요약하기도 하고, 머릿속에 맴도는 유행가를 드럼세탁기 속에서 돌아가는 빨래로 표현하기도 한다. “1년이 늘 365일인 것은 아니다. 하루가 늘 24시간인 건 아니다”라며 상식을 깨뜨리는 착상으로 생각의 전환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이런 종류의 영상에세이가 흔히 그렇듯, 아포리즘 식의 감동이나 설교조의 교훈으로 슬쩍 데리고 가는 일도 거의 없다는 게 더욱 마음에 든다. 가끔 특정 책의 인용에만 매달려 ‘거저 먹는 거 아냐?’ 싶은 에피소드가 없는 건 아니지만, 항상 연출에 공을 들이고 애를 쓴 흔적이 돋보인다.
e(이)는 한없이 무한에 가까운 함수인가 보다. ‘지식채널 e’는 컬처(culture)의 e로 노닐다, 메모리(memory)의 e로 떠오르다, 이코노미(economy)의 e로 달린다. 작은 드라마, 작은 다큐멘터리, 작은 고발장, 작은 선언문들이 끝없이 펼쳐진다. 그 5분의 양식으로 나도 잠시 지식의 바다에 들어선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지식채널 e’는 역시 예고편이다. 흥미롭고 짜릿하지만 본편의 지식과 공부가 주는 감동을 대신할 수는 없다. 다만 티브이 뒤에도 도서관이 서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귀띔해 주고 있을 뿐이다.
이명석/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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