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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지금은 방송중] 살점 떼어내되 피 흘리지 않기

등록 2007-08-12 21:44

지금은 방송중
요즈음엔 글은 통 쓰지 않고 만화책만 본다. 〈불량주부〉를 함께 작업했던 설준석 작가와 만화 〈타짜〉를 드라마로 각색 중이기 때문이다. 신난다. 좋은 재료를 얻은 요리사의 기분이랄까? 칼을 잘 갈아놓고, 깨끗이 삶은 행주와 도마를 늘어놓으며 이걸 어떻게 요리할까 고민 중이다. 탕을 끓일까? 찜을 찔까? 확 튀겨버려? 뭐 그런 고민 중이란 말이다. 그래서 잠시 칼을 내려놓고 각색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한다.

각색이란 작업은 참으로 묘한 것이다. ‘최대한 원작과 같게, 그러나 최대한 다르게’ 완성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말이 되는가? 이건 마치 〈베니스의 상인〉에서 샤일록에게 ‘살점을 떼어내되 피는 한 방울도 흘리지 말 것’이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게다가 모든 장르들은 나름의 기법을 가지고 있어서 드라마나 영화의 영상이 소설 속의 세밀한 심리묘사를 따라잡기 힘들고, 아무리 잘 묘사한다 한들 소설의 설명이 영상의 생생함을 따라잡기 힘들다. 장르의 전환에 덧붙여 시대배경이나 정서의 문제까지 겹쳐지면 이건 완전히 다시 쓰는 일이 된다.

〈타짜〉의 경우 1부는 지리산에서 빨치산들이 활동했던 당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다분히 시대물 분위기가 난다. 판돈도 차원이 다르다. 백만원 정도가 걸리면 큰 판이다. 새로운 시대를 찾는 것이 첫 번째 숙제다. 당연히 정서와 캐릭터도 바뀐다. 시대가 원하는 욕망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원작 버리기 작업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버리긴 버리되 원작의 맛이 남아 있지 않으면 소용없다. 그럼 무엇을 남기느냐. 모티브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잘라낸 샤일록의 살덩이 한 점. 원작자의 모든 정수가 담긴 핵심.

그럴 바에야 그냥 창작을 하는 게 나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간만에 만난 좋은 재료를 만져보고 싶은 요리사의 심정은 또 그런 게 아니다. 게다가 요즈음 영화나 드라마들은 원작을 각색하는 것이 하나의 흐름처럼 되어버리고 말았다. 작가들끼리 모이면 이런 우스갯소리를 한다. “네가 화투 이야기 쓴다고 해봐. 방송사에서 받아줄 것 같아? 미친 소리라고 한다구. 하지만 타짜가 원작이라고 해봐. 그건 문제가 달라.”

확실히 그렇다. 일본이나 할리우드 영화 리메이크 바람만 봐도 전세계적인 현상 같다. 그러나 작가로서 원작에 업혀간다는 건 썩 명쾌한 일이 아니다. 글쟁이라면 누구나 창조의 원형을 갖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새로운 창작을 의미할 만한 각색이 절실하다. 원작에 봉사하는 시녀 말고, 새로운 왕이 필요하다.

아무튼, 패는 돌려졌다. 내 옆에 설준석 작가가 있고 맞은편에 허영만 작가님과 김세영 작가님이 패를 들고 앉아 있다. 어, 그러고 보니 옆에 최동훈 감독도 앉아 있다. 어찌되었든, 이번엔 장땡을 잡아야 한다.

강은정/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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