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쾌도 홍길동’ 기대해도 좋아요! - 26일 오후 용산 CGV에서 열린 KBS 새 수목드라마 ‘쾌도 홍길동’의 제작발표회에서 출연배우 장근석(왼쪽부터), 성유리, 강지환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DMB폰으로 핸드폰 기기 변경을 했지만 단순한 숫자맞추기 오락외에는 활용할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던 기계치인 나에게 [쾌도 홍길동]은 DMB 기능을 사용하게 함은 물론,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의 어느 구간에서 지상파 채널이 끊기는 지를 파악하게 만들어준 의미있는 문화콘텐츠였다. (사실 나는 날이 갈수록 똑똑해지는 핸드폰 기능과 사람들의 부응에 불만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그리고 DMB 기능 사용에 익숙해질 무렵 [홍길동]이 막을 내렸다.
[홍길동]을 집에 앉아 편히 볼 수 있는 날이면, 거실의 대형 PDP TV를 포기하고 공부방에 가져다놓은 21인치 TV와 혼자 마주하고는 풍성한 베게를 껴앉고 부동자세로 그 시간을 즐겼다. 대충 보던 다른 드라마와는 달리 [홍길동]은 배우들의 사랑스러움은 물론이요, 표현방식이나 매회 내용도 신선했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가장 열광시킨 지점은 내가 아무리 이렇게 글을 써서 왕왕대도 그저 우리끼리의 말잔치로 끝나기 쉽상인 우리 주변을 둘러싼 현상들의 행간을 아주 쉽고 재밋게 풀어내어 무차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홍길동]은 내게 그저 드라마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내가 향후 어떤 글쓰기를 어떻게 해 나갈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들어준 자극 그 자체였다. 그래서 [홍길동]을 보는 밤이면 나는 혼자 좁은 공부방에 혼자 앉아 종소리를 들었다.
그러더니 결국 [홍길동]도 마지막회를 맞고야 말았다. 마음 같아서는 고무줄처럼 늘어나 장기간 공중파를 차지하고 있는 각종 일일극이나 주말극들을 몰아내고 계속 보고 싶지만, 그 옛날 [모래시계]가 그랬듯 [홍길동]도 이렇게 끝을 향해 제대로 질주함으로써 더욱 빛났음을 알기에 아쉽긴 했지만 연장해달란 댓글 따윈 달지 않았다. 나같은 팬들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홍길동]은 가장 [홍길동]다운 대미를 장식하면서 끝이 났다. 개인적으로 가장 감동적이었던 두번의 장면이 있었는데, 하나는 홍길동과 활빈당 그리고 백성들이 왕에 맞서 횃불을 들고 산에서 맞서던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홍길동과 활빈당의 최후를 그린 장면이었다. 드라마들이 시청률에 이리저리 끌려다니거나 서둘러 허겁지겁 미봉하고 끝나기 쉽상이었던 요즘, 마지막회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남긴 드라마가 요근래 있기나 했는가를 생각해보면 [홍길동]은 주인공만 용감한게 아니라 만드는 사람들도 제법 용감했던 드라마였다. [홍길동]의 마지막 마천산 진압 장면이 내게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그 장면이 서정적으로 그려져서도 아니고 그 앞에 활빈당과 관군의 제법 긴 전투씬때문도 아니다. 홍길동을 위시한 활빈당 당원들이 꿈꾸던 작고 소박한 공동체 안에서 짧지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보여주고 그 위로 날아드는 불화살로 마무리를 함으로써, 그리 대단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 사람들에게 기득권이 행하는 폭력의 지점이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주인공이 죄다 살아남는 해피앤딩이 아닌 결말을 두고 각종 연예뉴스나 시청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나, 나는 그럼으로써 이 결말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아주 오래오래 불편하지만 뭉클하게 남기를 바란다. 사실 나조차도 소설 속에서 홍길동이 사람들을 이끌고 섬으로 들어가 율도국을 세운다는 결말 때문에 창휘가 홍길동과 활빈당에게 배를 내어주는 것이 아닐까 은근히 기대했었지만, 생각해보면 역대 어느 기득권이 자신들의 기득권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대중들에 대해 그런 은전(?)을 베풀었던가 돌아보면 그것은 과욕 정도가 아니라 허황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홍길동]의 마지막회가 방영되던 전주(前週) 내내 새 정부의 '공권력 강화'니 '공권력 행사의 면책특권'이니 하는 말을 들으며 보냈고, 주말에는 미군 부대 확장으로 쫒겨나야 했던 대추리 주민들의 투쟁의 기록을 담은 [길]을 봤었다. 대추리의 싸움이 한창이던 2006년에 나는 뭘 하고 있었던가..별거 아닌 껍데기를 지켜보겠다고, 각종 힘없는 사람들이 존재감을 표현하던 깃발들을 향해 조소로 일갈하던 부서장의 눈치를 보면서 나는 부서장에게 회의실로 불려들어갈 때마다 "나는 노동문제 같은 거에는 관심이 없어요", "나는 사회문제에는 관심이 없어요"라는 다짐아닌 다짐을 몇번을 했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그리고 내가 그런 자기모멸 속에 껍데기를 지키고자 태평로 빌딩 한귀퉁이에서 아둥바둥하고 있을 때, 대추리의 칠순 할머니는 바로 한블럭 떨어진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고 외롭게 울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 "다리가 떨려서 서있지 못하겠다"던 그 할머니의 눈물과, "그저 평생을 살던 곳에서 살겠다던 곳에서 살겠다는 것 뿐인데 그것도 안되는 것이냐"던 다른 할머니의 울부짖음이, 그런 힘없는 할머니들을 향해 방패를 몽둥이 삼아 휘두르던 공권력과 함께 범벅이 되고 있었다. 주말 내내 나의 병신스러웠던 2006년의 기억과 화면 속의 범벅이, 그렇게 강력하게 휘둘러지던 공권력에 뭘 더 부여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는 정부의 지껄임이 웅웅 떠다녔는데, [홍길동] 마지막회의 마천산에서의 최후 위로 그렇게 웅웅 떠다니던 일들이 오버랩되면서, 그 본질이 빨갛게 튀어올라 가슴에 와서 꽃처럼 박혔다. 생각해보면 강한 공권력에 목메인 우리 정부가 병신스럽게 한마디 소감조차 표현하지 못하는 티베트 유혈사태나, 아직까지도 시원하게 규명되지 않은 우리의 광주나,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는 대한민국 구석구석의 대추리들까지 그 안에서 대중이 보아야 하는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일들은 힘없는 사람들이 꿈꾸는 그닥 대단할 것도 없는 당연한 바램들이 기득권이 누려온 수혜에 좁쌀만큼의 전복의 여지라도 끼워져 있을 때 얼마나 잔인한 방법으로 묵살되는 가를 보여준다. 또 이런 대립의 지점에서 기득권이 일말의 인간적인 마음을 발휘하는 일 따위는 존재하지 않음도 보여준다. [홍길동]은 이런 본질을 역사 속의 사건에서가 아니라 허구의 창작물에서 망각하지 않고 구현했고, 기득권의 벌이는 파괴와 폭력의 지점에 대단한 위협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힘없는 사람들의 단란하고 행복했던 삶이 존재했슴을 들이밀었다. 그동안 각종 콘텐츠들이 이런 류의 문제에서 집중해왔던 기득권 폭력의 모습이나 대립의 이유 뒤로 간과되었던, 힘없는 사람들의 꿈이나 그들이 지키고 싶은 작은 일상들이 그 자체로 그들의 행보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울림이 된다는 것을 [홍길동]이 짚어주고 있었다. [홍길동]은 "기억하라, 세상 어디에도 홍길동은 남아있다"란 나레이션을 남기고 끝이 났다.[홍길동]은 끝이 났지만 세상엔 홍길동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홍길동이 생겨날 수 밖에 없는 부조리함들이 남아있다. 그 옛날 홍길동이 꿈꾸던 양반과 천민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있지만, 그 옛날 홍길동이 정말 꿈꾸던 천한자와 귀한자는 오늘날 돈과 권력의 세습이란 다른 이름으로 우리들의 세상 안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역사속에서 수많은 역적들이 꿈꿧던 평등해진 세상에 살고 있는 한편, 다른 이유로 똑같이 불평등한 세상을 딛고 있다. 우리가 정작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우리 안에 홍길동만 남은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남겨진 세상이다. 그런 어제와 오늘도 지켜져야 할 권리들의 외면 속에, 일반 국민들에게 필요한 치안강화나 사법 대책 대신 공권력 강화는 외쳐지고 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더니 결국 [홍길동]도 마지막회를 맞고야 말았다. 마음 같아서는 고무줄처럼 늘어나 장기간 공중파를 차지하고 있는 각종 일일극이나 주말극들을 몰아내고 계속 보고 싶지만, 그 옛날 [모래시계]가 그랬듯 [홍길동]도 이렇게 끝을 향해 제대로 질주함으로써 더욱 빛났음을 알기에 아쉽긴 했지만 연장해달란 댓글 따윈 달지 않았다. 나같은 팬들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홍길동]은 가장 [홍길동]다운 대미를 장식하면서 끝이 났다. 개인적으로 가장 감동적이었던 두번의 장면이 있었는데, 하나는 홍길동과 활빈당 그리고 백성들이 왕에 맞서 횃불을 들고 산에서 맞서던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홍길동과 활빈당의 최후를 그린 장면이었다. 드라마들이 시청률에 이리저리 끌려다니거나 서둘러 허겁지겁 미봉하고 끝나기 쉽상이었던 요즘, 마지막회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남긴 드라마가 요근래 있기나 했는가를 생각해보면 [홍길동]은 주인공만 용감한게 아니라 만드는 사람들도 제법 용감했던 드라마였다. [홍길동]의 마지막 마천산 진압 장면이 내게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그 장면이 서정적으로 그려져서도 아니고 그 앞에 활빈당과 관군의 제법 긴 전투씬때문도 아니다. 홍길동을 위시한 활빈당 당원들이 꿈꾸던 작고 소박한 공동체 안에서 짧지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보여주고 그 위로 날아드는 불화살로 마무리를 함으로써, 그리 대단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 사람들에게 기득권이 행하는 폭력의 지점이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주인공이 죄다 살아남는 해피앤딩이 아닌 결말을 두고 각종 연예뉴스나 시청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나, 나는 그럼으로써 이 결말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아주 오래오래 불편하지만 뭉클하게 남기를 바란다. 사실 나조차도 소설 속에서 홍길동이 사람들을 이끌고 섬으로 들어가 율도국을 세운다는 결말 때문에 창휘가 홍길동과 활빈당에게 배를 내어주는 것이 아닐까 은근히 기대했었지만, 생각해보면 역대 어느 기득권이 자신들의 기득권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대중들에 대해 그런 은전(?)을 베풀었던가 돌아보면 그것은 과욕 정도가 아니라 허황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홍길동]의 마지막회가 방영되던 전주(前週) 내내 새 정부의 '공권력 강화'니 '공권력 행사의 면책특권'이니 하는 말을 들으며 보냈고, 주말에는 미군 부대 확장으로 쫒겨나야 했던 대추리 주민들의 투쟁의 기록을 담은 [길]을 봤었다. 대추리의 싸움이 한창이던 2006년에 나는 뭘 하고 있었던가..별거 아닌 껍데기를 지켜보겠다고, 각종 힘없는 사람들이 존재감을 표현하던 깃발들을 향해 조소로 일갈하던 부서장의 눈치를 보면서 나는 부서장에게 회의실로 불려들어갈 때마다 "나는 노동문제 같은 거에는 관심이 없어요", "나는 사회문제에는 관심이 없어요"라는 다짐아닌 다짐을 몇번을 했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그리고 내가 그런 자기모멸 속에 껍데기를 지키고자 태평로 빌딩 한귀퉁이에서 아둥바둥하고 있을 때, 대추리의 칠순 할머니는 바로 한블럭 떨어진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고 외롭게 울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 "다리가 떨려서 서있지 못하겠다"던 그 할머니의 눈물과, "그저 평생을 살던 곳에서 살겠다던 곳에서 살겠다는 것 뿐인데 그것도 안되는 것이냐"던 다른 할머니의 울부짖음이, 그런 힘없는 할머니들을 향해 방패를 몽둥이 삼아 휘두르던 공권력과 함께 범벅이 되고 있었다. 주말 내내 나의 병신스러웠던 2006년의 기억과 화면 속의 범벅이, 그렇게 강력하게 휘둘러지던 공권력에 뭘 더 부여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는 정부의 지껄임이 웅웅 떠다녔는데, [홍길동] 마지막회의 마천산에서의 최후 위로 그렇게 웅웅 떠다니던 일들이 오버랩되면서, 그 본질이 빨갛게 튀어올라 가슴에 와서 꽃처럼 박혔다. 생각해보면 강한 공권력에 목메인 우리 정부가 병신스럽게 한마디 소감조차 표현하지 못하는 티베트 유혈사태나, 아직까지도 시원하게 규명되지 않은 우리의 광주나,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는 대한민국 구석구석의 대추리들까지 그 안에서 대중이 보아야 하는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일들은 힘없는 사람들이 꿈꾸는 그닥 대단할 것도 없는 당연한 바램들이 기득권이 누려온 수혜에 좁쌀만큼의 전복의 여지라도 끼워져 있을 때 얼마나 잔인한 방법으로 묵살되는 가를 보여준다. 또 이런 대립의 지점에서 기득권이 일말의 인간적인 마음을 발휘하는 일 따위는 존재하지 않음도 보여준다. [홍길동]은 이런 본질을 역사 속의 사건에서가 아니라 허구의 창작물에서 망각하지 않고 구현했고, 기득권의 벌이는 파괴와 폭력의 지점에 대단한 위협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힘없는 사람들의 단란하고 행복했던 삶이 존재했슴을 들이밀었다. 그동안 각종 콘텐츠들이 이런 류의 문제에서 집중해왔던 기득권 폭력의 모습이나 대립의 이유 뒤로 간과되었던, 힘없는 사람들의 꿈이나 그들이 지키고 싶은 작은 일상들이 그 자체로 그들의 행보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울림이 된다는 것을 [홍길동]이 짚어주고 있었다. [홍길동]은 "기억하라, 세상 어디에도 홍길동은 남아있다"란 나레이션을 남기고 끝이 났다.[홍길동]은 끝이 났지만 세상엔 홍길동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홍길동이 생겨날 수 밖에 없는 부조리함들이 남아있다. 그 옛날 홍길동이 꿈꾸던 양반과 천민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있지만, 그 옛날 홍길동이 정말 꿈꾸던 천한자와 귀한자는 오늘날 돈과 권력의 세습이란 다른 이름으로 우리들의 세상 안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역사속에서 수많은 역적들이 꿈꿧던 평등해진 세상에 살고 있는 한편, 다른 이유로 똑같이 불평등한 세상을 딛고 있다. 우리가 정작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우리 안에 홍길동만 남은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남겨진 세상이다. 그런 어제와 오늘도 지켜져야 할 권리들의 외면 속에, 일반 국민들에게 필요한 치안강화나 사법 대책 대신 공권력 강화는 외쳐지고 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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