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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나한테는 소가 사람보다 낫지”

등록 2009-01-04 19:26

다큐멘터리 ‘워낭소리’
여든 살 할아버지와 마흔 살짜리 소의 동행을 그린 다큐멘터리 <워낭소리>는 사라져가는, 혹은 잊혀져가는 것들에 바치는 눈물겨운 헌사다. 좋은 영화가 대개 그렇듯, 생로병사의 숙명을 묵묵히 받아내는 존재들을 통해 살아 있다는 것의 무게를 새삼 느끼게 하는 영화다. 카메라는 할아버지와 소의 걸음처럼 천천히 우리 농촌의 맨살을 쓰다듬는다.

80살 할아버지·40살 소 ‘30년 동행’
절제된 영상으로 농촌 맨살 쓰다듬어

■ 할아버지와 소 최원균 할아버지와 소는 닮았다. 주름진 얼굴, 비쩍 마른 몸, 멍한 눈동자. 다리가 불편해 잘 걷지 못하는 것도 닮았고, 말이 없는 것도 닮았다. 소가 끄는 달구지는 할아버지의 유일한 자동차. 그는 사람들에게 “이 소를 30년 타고 다녔다”며 “나한테는 이 소가 사람보다 낫다”고 말한다. 소가 먼저 죽으면 어떻게 할 거냐는 물음에 “장사 치러 줘야지. 내가 상주질 할 건데”라며 웃는다.

■ 질투하는 할머니 감상에 빠지기 쉬웠던 다큐가 유머로 반짝거릴 수 있었던 건 이삼순 할머니 덕분이다. 할머니는 해설이 따로 없는 이 다큐의 내레이터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늘 지청구를 늘어놓는데, 심지어 소와 할아버지 사이를 질투한다.

“소는 부지런한 사람 잘 만나지 않았습니까? 내가 못 만났지. … 아이고 누구는 팔자 잘 타고 나서, 싱싱한 영감 만나서 농약도 치는데 …. 저 놈의 소가 죽어야 끝을 내지, 언제나 내 팔자가 피려나. 농사가 우예 되든지 맨날 소 꼴만 베고 ….” 할머니의 어록은 싱싱하다. 할아버지가 고장난 라디오를 두들기자, “라디오도 고물, 영감님도 고물”이라며 놀리는 장면은 삶의 애환이 깃든 유머의 진수를 보여준다.

■ 그리고 이충렬 감독 프리랜서 방송 피디 일을 하는 이충렬(43) 감독은 “나이 먹어 돈도 못 벌고, 장가도 못 가고 떠돌아다니기만 하니까, 아버지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며 “아버지랑 의사소통 하지 못했던 먹먹한 느낌을 담아 이 시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소와 아버지와 고향의 얘기를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최 할아버지와 소를 만난 건 2005년 3월. 전국의 우시장과 농촌을 헤맨 지 5년 만에 찾아낸 주인공이었다. 경북 봉화의 축협 관계자로부터 연락을 받고 내려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할아버지와 소는 어릴 적 기억 속 그림 그대로였다.” 그는 “사금파리처럼 흩어져 있던 그분들의 삶을 다시 온전한 그릇으로 만들어드린다는 심정으로 다큐를 찍었다”고 말했다.

■ 명품 다큐의 탄생 <워낭소리>는 드라마와 영상이 모두 뛰어난 명품 다큐다. 할아버지와 소를 시샘하는 듯하지만, 두루 깊은 애정을 갖고 있는 할머니, 소한테 해가 될까봐 농약도 치지 않고, 사료 대신 풀을 베어다 먹이는 할아버지의 정성, 이제는 늙어 걸어다닐 힘도 없는 소가 할아버지를 위해 전력을 다하는 모습, 젊은 소가 들어와 늙은 소를 구박하는 광경 등 극적인 요소가 넘친다.

절제와 기다림의 미덕을 아는 감독의 우직함은 다큐의 완성도를 극대화했다. “급할 게 없는 할아버지와 소의 템포에 맞추기 위해” 들고 찍기(핸드헬드)로 급하게 다가가기보다는 오랜 시간 기다리며 ‘멀찌감치’(롱 샷) 찍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게 하는 데만 여섯 달, 촬영은 햇수로 3년이 걸렸다. 새와 풀벌레 소리, 워낭(소의 턱 밑에 달린 방울) 소리가 청각 이미지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피아노와 대금 소리는 꼭 필요한 장면에만 사용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과 서울독립영화제 관객상을 받았고, 오는 15일부터 열리는 2009 선댄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15일 개봉.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사진 인디스토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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