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린·정희태·이승형(왼쪽부터).
조연 전성시대 3인3색
웬만큼 영화를 즐겨보는 사람이 아니라면 스티브 부세미가 누군지 몰라도, 그가 스크린에 등장하기만 하면 ‘아, 이 영화, 상황이 좀 꼬이겠구나’라고 짐작한다. 실업자나 살인자, 무능력한 회사원 등 밑바닥 인생들을 그려내는 그의 연기는 ‘전설 아닌 레전드’급이다. 이름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얼굴만 봐도 그가 ‘누구’를 연기할 것인지를 짐작케하는 배우, 우리에게도 있다. 임현식부터 박철민, 성지루…. 그들이 등장하면 우리는 급박한 드라마의 흐름에서 잠시 숨을 돌린다. 그들의 뒤를 조용히 잇고 있는 조연 세 명을 만났다.
‘밥줘’ 영주역 최수린
“그래도 사랑받는 악녀라 행복하답니다”
한국방송 <내 사랑 금지옥엽>의 후반부, 훈훈했던 드라마를 극한 설정으로 밀어넣은 인물은 다름아닌 영주라는 캐릭터다. 전 남편의 재혼을 막무가내로 반대하면서 저질렀던 패악은 당시 ‘막장’ 드라마 논란과 함께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영주를 연기한 최수린이라는 이름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계절이 바뀌기도 전에 문화방송 <밥줘>에서 그는 다시 악역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한 가장의 옛 애인으로 등장해 집안 하나를 풍비박산 낼 태세다. “이번에는 그래도 주인공에게 사랑받는 악녀에요. 나름 행복하죠. 하하.”
그가 ‘악녀’ 역을 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반부터다. 김수현 드라마 <불꽃>의 조연으로 주목받은 그는 주로 <이별없는 아침>(에스비에스), <난 네게 반했어>(한국방송) 등 아침드라마와 많은 단막극 등에 등장해 안온한 가정을 파탄내는 ‘생계형’ 팜므 파탈역을 싹쓸이했다. 실제로 그의 외모는 선이 굵지 않아 악역에 적확하지는 않다. 그의 무기는 목소리와 정확한 발성. 특히 귀보다는 가슴에 쏙쏙 꽂히는 ‘험한’ 대사의 전달력은 듣는 이들의 소름을 돋게 한다. 그의 정확한 발성은 그가 에스비에스 공채 엠시 1기 출신이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진행자 이미지의 말투를 고치려고 무던히 애쓰던 때도 있었어요.”
그는 중견배우 유혜리의 친자매라는 사실이 화제가 될만큼 지금은 유명세를 타고 있다. 그럼에도 스스로에 대해서는 ‘이제야 준비되기 시작한’ 배우라고 답한다. “알려지지 않았지만 1995년 최재성씨와 출연했던 <까치네>에서 준비가 안 된 상태로 연기를 시작했다가 낭패를 봤죠. 다시 신뢰를 쌓아 연기를 할 수 있기까지 5년이 걸렸어요.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행운이라는 사실을 그 때 알았어요.” 그 이후로 5년동안 절치부심했다. 이제 그는 “악역을 주로 맡게 된 상황에서 기왕이면 정말 머리부터 발끝까지 악한 인물을 연기하고 싶다”는 바람을 밝히기도 할만큼 연기에 대한 배짱도 생겼다. 물론 ‘피해를 당하는 역할을 더 잘할 사람’이라는 <밥줘> 제작진의 말처럼 그가 지닌 색깔은 다양하다. 실제로 한국방송 <파트너>에서는 남편의 불륜에 속앓이를 하는 아내로 등장하고 있기도 하다. “20대 혼란한 세월을 보내면서 그래도 내가 제일 하고 싶은 것을 하자고 다짐했고, 연기를 뒤늦게 시작했지만 단역, 조연도 주어진다는 것에 감사해하고 있어요. 그것만으로도 행운입니다.”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사진 문화방송 제공 ‘하얀 거짓말’ 안 집사역, 정희태
뜨기 시작했지만…“당장 일 없어 걱정인걸요”
<하얀 거짓말>의 마지막 촬영을 앞둔 정희태의 얼굴은 밝지만은 않았다. 주연급 배우들의 ‘시원섭섭함’은 그에게는 아득한 감정이었다. “다음 주부터는 당장 일이 없는데…. 좀 걱정이네요.”
<하얀 거짓말>은 아침드라마로는 드물게 20%의 시청률을 올리며 많은 화제를 낳았다. 김해숙의 열연, 김태현의 정신지체 연기까지 더해지면서 전체 시청률 1위에 올랐고, 아침드라마로는 드물게 연장방송으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지금껏 눈에 띄지 않던 캐릭터 하나가 부각됐다. 바로 신회장(김해숙)을 수족처럼 따라다니는 안비서다. 계기는 자신들이 재미로 찍어 올린 인터넷 춤 동영상을 통해서다. 2명의 주연배우 옆에서 더 능청스럽게 춤을 추는 정희태의 모습에 누리꾼들은 박장대소했고, 눈밝은 몇몇은 그가 “네”라는 대사 한마디로 애증, 연민, 권태 등을 표현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한다는 사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뜨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그는 자신을 알리는 데 익숙하지 않은 배우였다. 경력을 물어도 “영화 몇 편과 연극 몇 편 정도인데요. 뭘….” 정도다. 사실 그는 이윤기 감독의 <러브토크>나 임창정 등과 함께 출연한 <위대한 유산>에서는 조연으로 가능성을 인정받는 등 여러편의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했고, 대학로 연극계에서는 주연급으로 분류되는 배우다. 최근에는 주연한 독립영화가 국제영화제에 출품되기도 했다.
“주연들이 한 장면에서 감정을 분절해서 단위별로 기쁨과 슬픔을 진행시킬 때 조연들은 옆에서 그 방향키 역할을 해주는 것이죠. 막연하게 주연의 감정에 묻혀가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화면을 장악해서도 안 되죠. 조용히 물러나서 주연배우가 최대치를 보일 수 있도록 조력하는 게 우선인 듯해요. 안비서도 그 연장선상이었구요.”
정희태는 안비서가 손을 앞으로 모을 때, 양복 바지 옆선에 갖다 댈 때, 말을 들을 때, 전달할 때 등 모든 동작의 의미를 따지고 계산하며 준비해왔다. “연기를 할 기회를 받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서요.”
자신의 이력을 알리기보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토론하고 싶어하는, 인터뷰가 익숙하지 않은 배우는 또 다른 기회가 올 때까지 스스로 생계를 이어가야 한다. 그럼에도 그는 “연극만해도 먹고 살 수 있다면 거기에 남으려는 분들이 아직도 너무 많거든요”라며 연극판을 걱정했다. 순수와 열정을 느끼게 하는 그는, 천상 배우다.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사진 두홍커뮤니케이션 제공
‘찬란한 유산’ 표 집사역, 이승형
90년대 CF스타…“연기위해 17년 쩔었죠”
“싸랑해요, 밀키*” 90년대 초 주윤발의 음료광고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당시 우유탄산 음료의 선풍적인 인기를 추억할 것이다. 당시 음료경쟁은 경쟁사가 주윤발의 대항마로 왕조현을 내세우면서 절정에 달했다. 또 당시 우유 탄산음료 시장을 삼분했던 또하나의 경쟁음료 ‘암바*’은 국내 톱모델을 내세우면서 경쟁에 뛰어들었다. 당시 광고 주인공은 ‘이승형.’ 당시 의류, 제과 등 80년대 말부터 90년대초 그는 광고계의 톱스타였다. “기억 안 나시죠? 허허….” 그의 말처럼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연기를 하고 싶었어요.”
1992년, 수많은 광고제의를 뿌리치고 그가 선택한 것은 에스비에스 공채탤런트(2기). “쩐다는 게 뭔지 알아? 수많은 삶이 몸 속에 쩔어야 해, 그래야 연기자가 되는 거야.” 1년 선배 성동일의 치기어린 한마디는 그의 가슴을 파고 들었고 그 때부터 그는 업소출연이나 광고 등을 자제했다. 그리고 그는 지게차 등 중장비 운전이나 중국집 주방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쩔기 위해서였죠.”
시청률 40%를 육박하며 인기를 끌고 있는 에스비에스 <찬란한 유산>에서의 ‘표집사’는 그렇게 단련해온 17년산 명품이다. 철없는 가족들이 유산을 두고 철없이 아웅다웅할 때 그들을 나무라며 던지는 그의 말 한마디, 표정하나에 ‘그래, 저 말은 내가 하고 싶었던 거야’라며 쉽게 동화되는 것은 수많은 단역과 조연, 그리고 ‘쩔기 위해’ 나섰던 생활전선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연기력 덕분이다.
주목을 받기 시작했지만 사실 그는 주연에 욕심이 없다. 목표는 일흔살까지 쉬지 않고 연기를 하는 것이 전부다.
사실 그는 20년전 이미 당시기준의 블록 버스터 주인공을 맡기도 했다. 1990년, 당시 ‘우뢰매’ 시리즈로 최고의 흥행감독이었던 김청기 감독의 태권브이 시리즈 실사영화판에서 주연인 태권소년 훈이역을 맡기도 했다. “연기가 너무 어색해서 더 어색하게 성우더빙을 했죠. 무언가 준비되지 않으면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배웠어요.”
배우가 완성체라는 것이 있다면, “3할도 아직인 것 같다”는 그는 17년동안 연기를 쉰적이 없다. 동네 건달, 배신하는 친구, 바람피는 남편 등 손가락질 당하는 수많은 캐릭터가 그의 손을 거쳤다. 자신의 이름보다는 극 중 캐릭터로 이력을 쌓아가는 그를 눈여겨본 연출자들은 주연을 빛나게 할 수 있는 자리라면 늘 그를 찾았다.
그는 매니저가 없다. “할 수만 있다면 자유롭게 연기만 하고 싶어서요. 실감하지는 못하지만 앞으로도 ‘떴다’고 해서 다른 데 눈돌리지 않을 거에요.” 연기를 하고 있음에도 그의 꿈은 여전히 연기를 계속 하는 것이다.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사진 이승형 제공
“그래도 사랑받는 악녀라 행복하답니다”
그는 중견배우 유혜리의 친자매라는 사실이 화제가 될만큼 지금은 유명세를 타고 있다. 그럼에도 스스로에 대해서는 ‘이제야 준비되기 시작한’ 배우라고 답한다. “알려지지 않았지만 1995년 최재성씨와 출연했던 <까치네>에서 준비가 안 된 상태로 연기를 시작했다가 낭패를 봤죠. 다시 신뢰를 쌓아 연기를 할 수 있기까지 5년이 걸렸어요.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행운이라는 사실을 그 때 알았어요.” 그 이후로 5년동안 절치부심했다. 이제 그는 “악역을 주로 맡게 된 상황에서 기왕이면 정말 머리부터 발끝까지 악한 인물을 연기하고 싶다”는 바람을 밝히기도 할만큼 연기에 대한 배짱도 생겼다. 물론 ‘피해를 당하는 역할을 더 잘할 사람’이라는 <밥줘> 제작진의 말처럼 그가 지닌 색깔은 다양하다. 실제로 한국방송 <파트너>에서는 남편의 불륜에 속앓이를 하는 아내로 등장하고 있기도 하다. “20대 혼란한 세월을 보내면서 그래도 내가 제일 하고 싶은 것을 하자고 다짐했고, 연기를 뒤늦게 시작했지만 단역, 조연도 주어진다는 것에 감사해하고 있어요. 그것만으로도 행운입니다.”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사진 문화방송 제공 ‘하얀 거짓말’ 안 집사역, 정희태
뜨기 시작했지만…“당장 일 없어 걱정인걸요”
90년대 CF스타…“연기위해 17년 쩔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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