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비법 프로그램’ 열광의 공식
오는 12일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다. 수험생들이나 그 가족들의 불안은 극에 달하기 마련. 재수생뿐만 아니라 고3을 바라보는 고2까지 포함한다면 이 시기의 불안과 초조는 알면서도 오랜 시간 방치해온 일종의 만성적 사회병리 현상이다. 극소수가 학벌사회 해체나 사교육 정상화를 주장하지만 입시철, 그들의 목소리는 더욱더 작아질 수밖에 없다. 방송가의 소재주의가 이러한 사회적 불안 심리를 놓칠 리 없다. 교육방송의 <공부의 왕도>(화 밤 10시40분), 케이블 채널 티브이엔의 <80일 만에 서울대 가기>(일 밤 11시) 등의 학습 프로그램들은 한편으로는 다큐멘터리, 다른 한편으로는 리얼 버라이어티라는 장르를 빌려와 일주일의 불안과 그 일주일에 1년, 2년을 보태야 하는 학생들의 불안을 거래한다. <…왕도>의 경우 교육방송 전체 콘텐츠 가운데 동영생 재생 횟수 3위, <80일 만에…>는 케이블 채널 동시간대 시청률 1위라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교육방송 ‘공부의 왕도’
‘사교육 없이 명문대 갔다’식
10대들을 위한 성공학 다큐 ‘명문대= 성공?’ 통속적인 성공 다큐멘터리 <공부의 왕도> 지난 2일 서울 동대문구 휘경공업고등학교. 교육방송 <공부의 왕도> 촬영 현장, 서울대에 진학한 졸업생 정원석(19)군이 후배들을 찾았다. “친구들과의 불화도 잦았고, 술이나 담배 등에도 손댔죠. 일탈의 시기였어요.” “학원가에 통용되는 방법론을 찾아 헤매기보다 책상에 앉아 차분하게 책을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다”는 정군의 증언(?)은 수능을 앞둔 10일 전파를 탄다. “공부를 못하는 저 같은 경우에는 중학교 때까지 선생님으로부터 존중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어요. 뭘 할 수 있다는 것도 배우지 못했구요. 실업계에 와서 선생님이 나에게 커피 한잔 권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존중받을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때부터 힘을 얻어 공부를 시작했죠.”
출연자들 100%가 이른바 명문대에 재학중이라는 점에서 ‘명문대 진학=성공’이라는 통념의 공식은 이 프로그램의 근간이다. <…왕도>는 ‘사교육의 혜택을 거의 받지 않고 명문대에 진학했다’는 식의 10대 성공학 다큐멘터리인 셈이다. 이는 특별히 물려받은 자본 없이 묵묵히 일해 성공했다는 시이오들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이 점에서 제작진은 솔직하다. 현장에서 만난 이희범 피디는 “지금까지 상위 1%의 학생들이 갖고 있는 학습법만을 다룬 것은 사실”이라며 “실제 교육 현장에서 자기만의 공부법으로 성과를 내는 학생들 대부분은 명문대 진학을 목표로 공부하는 것 또한 현실”이라고 말한다. 이 피디는 “성공적으로 진학한 학생들 가운데 사교육에 크게 의지하지 않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며 “간접적이지만 이런 사실도 알리고 싶었던 것”이라고 했다. 티브이엔 ‘80일 만에 서울대 가기’ 노골적인 ‘리얼 쇼’ 형식 빌려
강남 유명 강사의 ‘비급’ 전수 사교육 리얼 버라이어티 <80일 만에 서울대 가기> “오마이갓, 이대로만 하면 당신은 뽀대남, 간지녀 명문대생이에요.”(3회 마지막 성우 내레이션) <…왕도>에 비한다면 <80일 만에…>는 조금 더 노골적이다. “대학보다 학과, 적성을 찾아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식의 교과서적인 언사는 통하지 않는다. 출연자들도 마찬가지다. 각자가 원하는 대학에다 ‘꿈’ ‘희망’이라는 단어를 대입한다. 그 대학에 갈 수 없다는 현실만으로도 눈물을 흘리고 좌절한다. 여기에 카메라 울렁증쯤은 진작에 극복한 서울 강남 유명강사들의 입담은 그들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기에 충분하다. 이때 ‘단백비급’(단번에 100점을 올릴 수 있는 비법)이 등장한다. 출연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금세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리얼 버라이어티와 마찬가지로 과제가 주어지고 그 과제에 통과한 출연자만이 환호를 받는다. 성과가 없어 아예 출연하지 않는 학생도 있다. 하지만 시청자들에게는 20점 이상을 올린 학생들만이 중요하다. 미션을 수행한 자만 살아남는 리얼 버라이어티의 공식이 교육 현실과 교묘하게 접목되는 순간이다. 이뿐만 아니다. 학생들을 비정상적으로 궁지에 몰아넣고 ‘나를 믿으라’는 식의 극한 설정을 해도 욕을 먹지 않고 통하는 곳은 사이비종교, 다단계, 3류 쿵후영화, 그리고 우리의 교육 현장뿐이라는 것이 이 프로그램에서 고스란히 재현된다. 누구나 비법이 없다는 것은 경험칙으로 알고 있지만 강남 사교육은 이미 현실이 아닌 우리 안의 가상공간이다. 프로그램 바깥에서는 제작진조차 의외라고 여길 만한 상황이 이어진다. 연출을 맡은 이길수 피디는 “사교육 조장이다, 강남 학원가 선전이다는 등의 비난을 감수하고 간다는 게 처음 생각이었는데 막상 방송해놓고 보니 논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며 “도리어 4주에 걸쳐 비법을 내보내지 말고 한꺼번에 보여달라는 주문이 쇄도했다”고 털어놨다. 실제로 <80일 만에…>의 누리집은 방송 당일인 지난달 18일 접속 폭주로 다운됐다. 학벌? 사교육? 일단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왕도>는 ‘공부 방법론’이라는 주제에 대해 좀더 체계적으로 들여다볼 계획이다. 이희범 피디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범위를 넓혀 진학보다는 공부 방법 자체에 일가를 이룬 학생들을 발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다만 “열심히만 하면 사교육 없이 혼자서도 잘할 수 있다는 두루뭉술한, 뻔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며 “스스로 각성하고 홀로 학습하려고 책상에 앉은 학생들에게 ‘이런 방법이라면 나도 할 수 있겠다’며 따라올 수 있도록 안내하는 지침서 역할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런 의미에서 정군의 이야기는 <…왕도>에 있어서는 프로그램의 전환점이다. 솔직하게 사교육에서는 어떤 점을 배웠고, 그것은 어떻게 도움이 됐는지를 차분하게 들여다볼 계획이다. <80일 만에…>는 수능 직전 방송(8일)에서 ‘찍기 비법’을 공개했다. 물론 새로운 것은 없다. 이전 비급 안의 내용 또한 기출문제 분석, 반복 학습, 예제 풀이 등 공교육 현장에서도 거의 매일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을 만한 내용들이다. 제작진은 “실제로 ‘춘삼전략’이나 ‘스파르타 300’ 등의 명칭은 제작진에서 포장한 것”이라며 “이 방법들이 갖고 있는 구체성과 그것을 실행한 출연자들이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 가지 논의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80일 만에…>는 수능이 끝나면 입시 전략에 대해 방송할 예정이다. 이 피디는 “입시 제도가 개편되면서 점점 더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이 진학에 훨씬 유리해지고 있다”며 “프로그램 중간에 가정형편상 사교육을 받을 수 없어 입시 정보가 부족했다는 학생, 돈 때문에 대학 선택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학생, 사교육에 지나치게 목매 실패했던 학생 등을 통해 프로그램의 지향성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학벌사회, 사교육 등의 질문에 대한 <…왕도>와 <80일 만에…> 제작진의 이구동성. “솔직하게 현실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겪고 있는 아이들의 어려움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고, 그 어려움을 현실적으로 해결해주는 것까지가 우리의 몫이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사진 교육방송 티브이엔 제공
10대들을 위한 성공학 다큐 ‘명문대= 성공?’ 통속적인 성공 다큐멘터리 <공부의 왕도> 지난 2일 서울 동대문구 휘경공업고등학교. 교육방송 <공부의 왕도> 촬영 현장, 서울대에 진학한 졸업생 정원석(19)군이 후배들을 찾았다. “친구들과의 불화도 잦았고, 술이나 담배 등에도 손댔죠. 일탈의 시기였어요.” “학원가에 통용되는 방법론을 찾아 헤매기보다 책상에 앉아 차분하게 책을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다”는 정군의 증언(?)은 수능을 앞둔 10일 전파를 탄다. “공부를 못하는 저 같은 경우에는 중학교 때까지 선생님으로부터 존중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어요. 뭘 할 수 있다는 것도 배우지 못했구요. 실업계에 와서 선생님이 나에게 커피 한잔 권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존중받을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때부터 힘을 얻어 공부를 시작했죠.”
출연자들 100%가 이른바 명문대에 재학중이라는 점에서 ‘명문대 진학=성공’이라는 통념의 공식은 이 프로그램의 근간이다. <…왕도>는 ‘사교육의 혜택을 거의 받지 않고 명문대에 진학했다’는 식의 10대 성공학 다큐멘터리인 셈이다. 이는 특별히 물려받은 자본 없이 묵묵히 일해 성공했다는 시이오들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이 점에서 제작진은 솔직하다. 현장에서 만난 이희범 피디는 “지금까지 상위 1%의 학생들이 갖고 있는 학습법만을 다룬 것은 사실”이라며 “실제 교육 현장에서 자기만의 공부법으로 성과를 내는 학생들 대부분은 명문대 진학을 목표로 공부하는 것 또한 현실”이라고 말한다. 이 피디는 “성공적으로 진학한 학생들 가운데 사교육에 크게 의지하지 않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며 “간접적이지만 이런 사실도 알리고 싶었던 것”이라고 했다. 티브이엔 ‘80일 만에 서울대 가기’ 노골적인 ‘리얼 쇼’ 형식 빌려
강남 유명 강사의 ‘비급’ 전수 사교육 리얼 버라이어티 <80일 만에 서울대 가기> “오마이갓, 이대로만 하면 당신은 뽀대남, 간지녀 명문대생이에요.”(3회 마지막 성우 내레이션) <…왕도>에 비한다면 <80일 만에…>는 조금 더 노골적이다. “대학보다 학과, 적성을 찾아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식의 교과서적인 언사는 통하지 않는다. 출연자들도 마찬가지다. 각자가 원하는 대학에다 ‘꿈’ ‘희망’이라는 단어를 대입한다. 그 대학에 갈 수 없다는 현실만으로도 눈물을 흘리고 좌절한다. 여기에 카메라 울렁증쯤은 진작에 극복한 서울 강남 유명강사들의 입담은 그들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기에 충분하다. 이때 ‘단백비급’(단번에 100점을 올릴 수 있는 비법)이 등장한다. 출연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금세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리얼 버라이어티와 마찬가지로 과제가 주어지고 그 과제에 통과한 출연자만이 환호를 받는다. 성과가 없어 아예 출연하지 않는 학생도 있다. 하지만 시청자들에게는 20점 이상을 올린 학생들만이 중요하다. 미션을 수행한 자만 살아남는 리얼 버라이어티의 공식이 교육 현실과 교묘하게 접목되는 순간이다. 이뿐만 아니다. 학생들을 비정상적으로 궁지에 몰아넣고 ‘나를 믿으라’는 식의 극한 설정을 해도 욕을 먹지 않고 통하는 곳은 사이비종교, 다단계, 3류 쿵후영화, 그리고 우리의 교육 현장뿐이라는 것이 이 프로그램에서 고스란히 재현된다. 누구나 비법이 없다는 것은 경험칙으로 알고 있지만 강남 사교육은 이미 현실이 아닌 우리 안의 가상공간이다. 프로그램 바깥에서는 제작진조차 의외라고 여길 만한 상황이 이어진다. 연출을 맡은 이길수 피디는 “사교육 조장이다, 강남 학원가 선전이다는 등의 비난을 감수하고 간다는 게 처음 생각이었는데 막상 방송해놓고 보니 논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며 “도리어 4주에 걸쳐 비법을 내보내지 말고 한꺼번에 보여달라는 주문이 쇄도했다”고 털어놨다. 실제로 <80일 만에…>의 누리집은 방송 당일인 지난달 18일 접속 폭주로 다운됐다. 학벌? 사교육? 일단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왕도>는 ‘공부 방법론’이라는 주제에 대해 좀더 체계적으로 들여다볼 계획이다. 이희범 피디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범위를 넓혀 진학보다는 공부 방법 자체에 일가를 이룬 학생들을 발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다만 “열심히만 하면 사교육 없이 혼자서도 잘할 수 있다는 두루뭉술한, 뻔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며 “스스로 각성하고 홀로 학습하려고 책상에 앉은 학생들에게 ‘이런 방법이라면 나도 할 수 있겠다’며 따라올 수 있도록 안내하는 지침서 역할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런 의미에서 정군의 이야기는 <…왕도>에 있어서는 프로그램의 전환점이다. 솔직하게 사교육에서는 어떤 점을 배웠고, 그것은 어떻게 도움이 됐는지를 차분하게 들여다볼 계획이다. <80일 만에…>는 수능 직전 방송(8일)에서 ‘찍기 비법’을 공개했다. 물론 새로운 것은 없다. 이전 비급 안의 내용 또한 기출문제 분석, 반복 학습, 예제 풀이 등 공교육 현장에서도 거의 매일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을 만한 내용들이다. 제작진은 “실제로 ‘춘삼전략’이나 ‘스파르타 300’ 등의 명칭은 제작진에서 포장한 것”이라며 “이 방법들이 갖고 있는 구체성과 그것을 실행한 출연자들이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 가지 논의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80일 만에…>는 수능이 끝나면 입시 전략에 대해 방송할 예정이다. 이 피디는 “입시 제도가 개편되면서 점점 더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이 진학에 훨씬 유리해지고 있다”며 “프로그램 중간에 가정형편상 사교육을 받을 수 없어 입시 정보가 부족했다는 학생, 돈 때문에 대학 선택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학생, 사교육에 지나치게 목매 실패했던 학생 등을 통해 프로그램의 지향성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학벌사회, 사교육 등의 질문에 대한 <…왕도>와 <80일 만에…> 제작진의 이구동성. “솔직하게 현실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겪고 있는 아이들의 어려움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고, 그 어려움을 현실적으로 해결해주는 것까지가 우리의 몫이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사진 교육방송 티브이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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