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서 행동파 기자로 변신한 이준기
‘히어로’서 행동파 기자로 변신한 이준기
1년 기다린 배역…“책임감이 날 지탱”
“직설로 파고드는 신문이 보고싶어져요”
1년 기다린 배역…“책임감이 날 지탱”
“직설로 파고드는 신문이 보고싶어져요”
스스로 구식이라고 말하는 남자. 효율, 경쟁이 미덕이 돼 버린 세상, 그래서 선악조차 함부로 가르지 못하는 세상에 때아닌 정의, 의리, 진실을 말하는 남자. 자신을 심심한 남자라고 말하는 남자. 자기 일을 머릿속에 집어넣고는, 쉴 때조차 쉴 새 없는, 잠들기 전까지 아예 그 세계에서 나오지 못하는, 그런 남자. 자기 전 “외롭다” 한마디로 하루를 마감하는 남자. 그 외로움은 일로밖에 안 풀리더라는 남자. “참, 매력 없죠?”라며 활짝 웃는 ‘그’ 남자, 이준기를 만났다.
“글쎄요…. 왜 이 단어가 자꾸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책임감’이죠. 책임감, 책임감…. 강박관념인가요? 하하하.”
지난 25일 경기도 양주의 문화방송 세트장. 수목 미니시리즈 <히어로>의 촬영이 한창이다. 시간을 계량할 수 없는 쪽잠으로 촬영을 강행군한 이준기, 백윤식 두 배우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용덕일보 사주답게 조용덕(백윤식)은 자리에 앉거나 바람을 쐬면서 수시로 세트장을 드나들었지만, 용덕일보 사회부 기자 진도혁(이준기)은 한시도 세트장을 뜨지 않았다. 자리에 앉지도 않는다. ‘초감각배우 이준기’라고 쓰여진 주연배우 전용의자는 한 번도 펼쳐지지 않았다. “자리에 앉을 틈이 어딨어요. 사람들하고 얘기하기도 바쁜데….” 피디뿐만 아니라 촬영스태프, 조명스태프, 스타일리스트 등 여러 스태프들과 얘기를 나눴다.
가만 들어보면, ‘어제 밤샘 힘들지 않았느냐,’ ‘미스코리아도 아닌데 머리는 그만 만지자’ 등 특별한 내용은 없다. ‘밤샘하고 웃으며 돌아다니는 것도 힘들 텐데, 좀 편하게 쉬어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 뒤 튀어나온 단어가 ‘책임감’이다. 현장에서, 드라마 안에서 주연배우로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일상에서라도 조금은 풀어져 있는 게 어떠냐는 질문에 대해 답할 때, 그는 ‘책임감’이라는 단어로 응수했다. “심심하죠? 저”라는 말도 뒤따랐다.
“주로 말리는 일을 하죠.”(이준기 소속사의 한 스태프)
배역에 지나치게 몰입하지 않도록, 과도한 책임감이나 의무감을 갖지 않도록, 인터뷰에서 자신의 속내를 너무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도록…. 지난 9월 대만 팬콘서트의 후일담은 이준기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준다. 콘서트를 이틀 남기고 방문한 대만 공연장. 공연 준비는커녕 무대 계약도 안 된 상태였다. 사기를 당한 것이다. “준기야, 그만하자.” 제작진은 입을 모아 공연 취소를 권했다. “무리한 공연으로 고생만 하고 욕먹는다”는 만류에도 “(팬들이 있는데)어쨌든 해 보자”고 이준기가 나섰다. 결국 원래 공연장에서 가까운 곳의 노인 대상 공연을 주로 하는 허름한 무대를 빌렸다. 거기서 이준기는 날았다. 대만 언론은 그날 공연을 두고 “이준기에게 우리가 빚졌다”며 열광했다.
<히어로>도 마찬가지다. 기다린 시간만 1년이 넘었다. 하지만 다른 작품에 눈 돌리지 않고, 묵묵히 캐릭터에 몰두했다. “배우는 뭐든 열심히 하면 남더라구요.” 캐릭터를 위해 하루 대여섯편의 영화 속에서 살았고, 그는 ‘짐 캐리’를 발견했다. 정극부터 코미디까지 완벽하게 소화하는 짐 캐리의 모습 속에서 용덕일보 진도혁 기자의 모습을 찾았다. “늘 재미있게, 때로 진지하게.” 진지하고 날카로운 모습은 대세일보 기자(엄기준)의 몫이었다. “사람들의 눈이 되겠다”는 선문답 같은 화두만 남기고 기존 기자들의 모습은 버렸다. 그가 키운 고민은 극 중에서 ‘먼데이서울’이라는 삼류 잡지 기자였던 진도혁이 기자로서의 깨달음을 얻는 용덕일보가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용덕일보는 자신의 애완견을 찾아달라는 소시민들의 아픔까지 귀 기울이는 신문사죠. 삼류가 모였지만 그래서 동류의 아픔을 더 잘 느낄 줄 알구요. 대본이 나와봐야 알겠지만 용덕일보가 나중에 성공하더라도 규모가 커지고 권력기관이 되기보다는 내 집처럼 드나들 수 있는 ‘가까운’ 신문사가 됐으면 좋겠어요.” 한참을 신나게 이야기하다가 표정을 바꾼다.
“자기 전에도 머릿속에 이런 생각들 하면서 (왠지 모르게) 반성하면서 자요. 우습죠. 하하하.”
정의, 책임감, 원칙, 반성까지…. 듣는 기자가 숨이 찼다. 준비된 듯한 달변의 뒷장으로 비치는 20대 배우의 얼굴은 오히려 불안해 보였다. 자기만의 원칙들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는 말을 보태어 질문했다. 질문을 마치기도 전에 꼬리를 물고 나오던 답변들과는 달리 한참을 머뭇거렸다. “외로워서…. 그런 것 같아요. 외로움에서 탈출하고 싶어서 그런 감정, 태도들을 스스로 찾고 바라는 것 같아요. 뭔가를 보여줘야 하고, 그게 그들에 대한 약속이니까….”
외로움이라는 단어 앞에서도 환하게 웃었다. 드라마, 배역 등을 충분히 말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못다 한 말을 하면서 인터뷰를 갈무리하자고 제안했다.
“지금 사회를 보면, 진실이 진실이 아니잖아요. 어떻게 보면 포장돼 있는 사실들을 어떤 식으로 보여주느냐에 따라 항상 좌지우지되는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을 직설적으로 파고드는 신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가만히 듣고 있는 기자의 얼굴을 보면서, 아차 싶었나 보다. “맞아요. 저 정의감이랄까. 그런 것들에 허황되게 불타요. 하하하.” 이준기는 “두서없어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 시침은 오후 2시에 머물러 있었다. 점심을 굶은 것도 잊었다.
양주/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사진 멘토엔터테인먼트 제공
‘히어로’서 행동파 기자로 변신한 이준기
‘히어로’서 행동파 기자로 변신한 이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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