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학번 새내기 곽정환은 영화가 좋았다. 고담준론은 사양하고 싶었던 터라 ‘얄라셩’이라는 학교 영화 동아리는 부담스러웠다. 학교 밖을 헤맸고, 영화를 실컷 볼 수 있다는 ‘코아 시네마 라이브러리’라는 모임을 찾았다. 최루탄 냄새를 지워가며 영화관을 지켰다. 구로사와 아키라, 왕자웨이의 영화들을 만났고 “저 이상의 것은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말을 한동안 입에 달고 살만큼 감동에 절었다. 하지만 그 영화광이 간 길은 영화가 아닌 드라마였다. 그의 주인공 대길이 연인을 찾기 위해 추노꾼을 택한 것처럼, 그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다. 인생을 건 승부였다.
곽정환 피디에게는 추노꾼 대길이가 송태하의 고담준론과 맞서는 것, 노비 업복이가 총을 드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송태하의 양반 중심의 세계관이 대길이의 “지랄 맞은 세상” 타령에 흔들리고, 업복을 옥죄던 상노가 업복의 마지막을 지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한방으로 승부를 거는 것이 아니니까. 수많은 이야기와 복선을 깔아놓으면서 “어디서건 느끼면 된다”고 말하는 게 곽정환의 방식이다. 그것은 “어디건 찌르면 된다”는 대길이의 무술을 닮았다.
“닮았다”는 말에 “친구 녀석이 전화를 걸어 대길이는 제 과거 모습을 닮았고, 송태하는 제가 닮고 싶어 하는 모습을 닮았대요.” 미리 생각하고 있었던 양 답한다. “현재는요?”라는 질문에는 “천지호…, 이번 기회를 빌려 저 때문에 고생한 스태프들에게 감사와 죄송의 말씀을…, 정말 사극은 다시 안 할랍니다”라고 너스레를 떤다.
23일 여의도 한국방송에서 편집을 막 끝낸 곽 피디를 만났다. 그는 승부를 막 끝낸 무사처럼 헐떡거렸다. 수염도 머리카락도 거칠게 날렸다. 인터뷰는 격투처럼 진행됐다. 합을 겨뤄보자는 듯 쏟아지는 주어와 술어의 구분이 없는 답변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기자의 난감함을 눈치챘는지 “말이 많죠, 제가?” 얄밉게 웃는다, 영락없이 노비를 잡은 듯 득의양양한 추노꾼 대길이다.
“대길과 업복이가 죽고 철웅은 울고 태하는 사라지죠. 각각의 인물들이 하나로 수렴되지 않고 각자의 인생 속에서 변화하고 퇴장하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어요.”
인물의 죽음이 많은 것에 비해서는 결말이 급박하지 않았다는 질문으로 살짝 자극해 봤다. 여지없이 반격했다.
“원래부터 혁명세력과 수구세력 대립 자체를 얘기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개인의 이야기가 중요했어요. 격동의 시기에 시대의 모순으로 발생하는 개인의 문제들이 운명의 소용돌이와 만나면서 어떤 화학작용을 일으키는지 보여주고 싶었죠. 드라마는(역사는) 결국 개인의 이야기니까요. 모순을 가진 사회가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개인은 거기에 적응하거나 또는 변화해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던 것이죠. 소수의 영웅이 아닌 보통 사람들의 개별적인 삶이 역사를 이끈다는….”
떼죽음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만한 주요 인물들의 죽음에 대해 다시 물었다. 업복의 죽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극에 활기를 불어넣은 네 주역들. 맨 위부터 이대길(장혁), 송태하(오지호), 업복이(공형진), 황철웅(이종혁).
“힘없는 자들이 순응하지 않는다(못한다)는 것은 배신과 죽음이라는 결과를 가져오죠. 절망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당시 노비들이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는 것, 그리고 일어서는 것, 또 업복이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그 사건은 절망의 바닥을 치는 또다른 희망이 아닐까요.”
결말에 대한 자신의 논리를 흔들림 없이 이어갔다. ‘4개의 결말’이라고 표현하며 “<추노>의 주인공은 대길과 태하만이 아니라 업복과 철웅도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시청자들에게 대길이와 태하가 주인공이라면, 저에게는 업복과 철웅이 주인공이에요. 그들의 존재감을 끝까지 지켜가기 위해서 작가와 무던히 애썼죠. <추노>의 시대를 현재에 대입한다면 현대인에게 가장 맞는 사람은 누군가요. 바로 철웅이죠. 남을 밟아야 살아남는 현실, 이해가 안 갈 만치 잔인무도하지만 그래서 더 그 인물 안에서 현실성을 확보하려 했어요. 업복이는 그 반대편에서 주제의식을 전달할 수 있도록 하는 인물이었고요. 연출자로서는 두 인물에 승부를 건 셈이죠.”
마무리를 짓는 듯하더니, “그러고 보면 천지호는 너무 의외의 반응이었어요. 사실 정말 나쁜 놈이잖아요. 모두 배우의 공이죠, 하하” 하며 웃어 제친다. “그 시대를 살아낸 <추노>의 모든 인물이 주인공”이라는 말 뒤에 꺼낸 단어는 ‘여성성’이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은 은실과 초복이죠. 거기에서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 여성 덕택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자기 영역에 침입하는 적들과 생각없이 목숨을 거는 수컷들은 대안이 아니에요. 여성성만이 인류의 대안입니다.”
‘인류’라는 단어에 웃음을 보이자, “그게 전달되지 않으면 제가 연출을 못한 거죠. 반성해야죠”라며 멋쩍은 듯 물러선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사전제작을 해서 작품 질을 더욱 높일 수 있는 환경이 됐으면 좋겠다”는 말에 힘을 준다. 인터뷰 초반부 “사극은 안 한다”는 말은 인터뷰의 마지막 답변 속에서 “드라마를 뜻대로 만들 수만 있다면, 사극이든, 현대극이든 가리지 않는다”는 말로 바뀌었다. 글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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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민폐 언년’…왜? “지독한 성차별의 사회 반영”
급박한 순간 키스…왜? “본능에 더 가까워지는 순간”
“언년이의 민폐는 왜?”
언년이(혜원)는 인터넷에 ‘민폐 리스트’가 돌 정도로 수동적인 캐릭터로 묘사돼 원성이 잦았음.
“시청자들이 보기에 그렇게 보이는 것은 맞아요. 양반만 되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지만 언년이는 여성이라는 굴레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런 측면을 그리고 싶었어요. 지독한 성차별이 존재했던 시기니까요. 그런 한계 속에서 변하는 것을 그리고 싶었어요.”
“왜 꼭 그때 키스를 했어야 했었나.”
정치적 대업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제주도를 벗어나야 하는 상황. 급박한 순간에 혜원과 태하가 키스를 하면서 다시 질타를 받음.
“대업을 앞에 두고 왜 키스하냐고 하는데, 그런 순간에 느껴지는 감정이야말로 어쩌면 더 본능에 가깝죠. 생존욕구와 맞먹을 정도로요. 그런 감정이 더 아름답지 않나요.”
“무공이 월등하던 태하가 대길에게 왜 잡혔을까.”
대길을 압도하던 태하는 자신의 아내가 실은 노비 언년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갑자기 대길에게 무릎을 꿇는다.
“아내가 노비였다는 충격 때문에 순간적으로 방심한 것이죠. 태하는 딱 그만큼의 한계를 가진 무관이었죠.”
“한섬의 죽음 장면은 완성도가 떨어졌다.”
“일단 컴퓨터그래픽이 아니니까 시지(CG) 논란은 아니구요. 그냥 하얀 천을 배경으로 찍었어요. 물론 완벽하진 않죠. 한섬 장면뿐만 아니라 11부 이후로는 다 아쉽죠.(사전제작은 10부까지만) 그래서 사전제작이 꼭 필요해요.”
“다른 영화에서 본 것 같은 장면이 많았다.”
태하의 청나라 군사와의 격투신 등
“영화 <300>요? 저도 촬영하고 난 다음 보니 그런 느낌이 나더라구요. 종전과는 다른 전투 장면을 만들어보자는 의도에서 나온 장면이에요. 우리 제작 여건에서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영광이라고 생각해요. <올드보이>의 장도리 신도 비슷하죠? 제가 박찬욱 감독을 제일 좋아하긴 해요.”
하어영 기자·사진 한국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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