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보는 남자
영국 <비비시>의 자동차 쇼 <탑기어>는 남자들(그리고 소수의 여자들)의 테스토스테론을 끓게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프로그램은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선 자동차로 할 수 있는 건 다 하는, 진짜 죽이는 쇼였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케이블 채널에서 방송하는 지난 시즌을 넋을 놓고 보기도 했다. 람보르기니, 벤츠, 페라리, 비엠더블유 같은 차들이 도심을, 사막을, 해변을, 농가를 질주하는 걸 보고 있으면 그냥 좋았다.
내가 유난히 ‘남성적인 취향’을 가져서일까? 그건 아니다. 아마도 내 생각에 그건 기계에 대한 취향 때문일 것이다. 기어가 맞물리며 돌아가는 것, 철컥철컥 소리가 나는 것, 그리고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것, 이런 맥락에서 기계에 대한 취향, 그 미학에 매료되는 취향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걸 딱히 남자의 것이라고 하기엔 모호한 게 사실이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그렇게 규정하는 건 오히려 곤란할 것이다. 어쨌든, 이런 맥락에서 <탑기어>는 마니아적 영역에서 일종의 특수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게 수면 위로 올라온 건 케이블채널<엑스티엠>에서 <탑기어 코리아>를 제작·방영한 뒤부터다. 방송은 이제 겨우 5회 미만이지만 자동차 마니아 혹은 마니아는 아니지만 나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충분히 화제가 되고 있다. 이름만 알고 있던, 인터넷 이미지 검색창에서만 볼 수 있던 슈퍼카로 도심을 질주하고 케이티엑스와 말도 안 되는 경주를 벌이는 이 버라이어티쇼는 여느 광고의 카피처럼 ‘자동차의 본질’을 깨닫게 만든다. 김갑수, 김진표, 연정훈 등이 출연해 직접 차를 몰고 미션을 수행하고 전문가 못지않은 평가를 주고받는 이 프로그램의 미덕은 일단 ‘재밌다’는 것이다.
1회에서는 아우디 아르(R)8과 케이티엑스, 그리고 경비행기의 서울-부산 레이스가 있었다. 2회에서는 람보르기니 무르시엘라고와 허머 에이치(H)2를 개인택시로 꾸며 서울 시내를 누볐다. 이런 미션은 다분히 유치하다. ‘설마 그걸 정말로?’라는 의문을 유발한다.
하지만 요컨대 이 값비싼 버라이어티쇼는 어릴 때 잡지에서 보던 ‘키트와 에어울프가 대결하면 누가 이길까?’처럼 쓸데없지만 원초적인 호기심을 부추긴다.
그래서 2주 연속 30대 남성 최고 시청률 1%를 돌파했다는 사실이야말로 <탑 기어 코리아>가 어떤 프로그램인지 짐작하게 해준다. 이때 중요한 건 <탑기어 코리아>가 볼만한 사람은 이미 다 보고 있는 자동차 버라이어티쇼란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걸 여기서 확인했다면 당신은 이미 뒤처졌다. 자동차를 좋아한다고 여기저기에 말하고 다녔다면 더더군다나 늦어버렸다. 그러면? 기어를 3단으로 넣고 액셀을 힘껏 밟아라. 타이어가 하얗게 타도록 내달리면 간신히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차우진/대중문화평론가
사진 엑스티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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