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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다큐를 보면 피디가 보인다

등록 2012-11-15 20:07수정 2012-11-15 20:47

김형준의 다큐 세상
잘될 다큐멘터리인가 아닌가를 알 수 있는 최초의 시점이 있다. 아이템이다. 심지어 거기에서 끝이 난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사람이 하지 않았던 이야기만 찾는 피디들도 있고, 이미 다루었던 소재를 새로운 시각으로 재구성하는 피디도 있다. 우리 부서의 피디들은 기획 기간이 되면 주린 늑대처럼 이리저리 기웃거린다. 서점에서 종일을 보내는 이도 있고, 사람만 만나러 다니는 이도 있다. 이거 좋은 거리다 싶어 며칠을 품었다가도 돌아보면 아닌 경우도 허다하다. 술자리에서 들은 한 토막의 이야기가 5부작 다큐멘터리가 되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본인은 정작 이번에는 새로운 이야기를 하겠다고 나서지만 지나보면 늘 그 사람이 할 법한 이야기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엄마에 관한 다큐를 만들었던 피디가 이번에는 아빠에 대한 다큐를 제작중이다. 다음에는 가족 전체에 대한 다큐를 준비한다. 집안 이야기를 자주 하지 않지만 그 피디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는 10분만 이야기해도 알 수 있다. 대학부터 밴드에 몰두했던 입사 동기는 콘서트 프로그램을 7년 넘게 하더니 우리 부서에 와서도 음악 다큐를 만들었다. 다른 방송사에서 일하는 피디는 음악으로 어떻게 다큐를 만드나 의아해하겠지만 오랫동안 지켜본 나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선배는 조선의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더니 기어이 정치 다큐를 만들고 말았다. 잘 어울린다. 그런 다큐를 그 선배 말고 누가 만들까 싶을 정도다.

자연 다큐도 다르지 않다. 한시를 외워 쓰는 것을 즐겨하는 선배는 고혹적인 날갯짓을 좇는다. 다람쥐를 찍어도 하늘을 나는 놈을 찾고 미조로 이름난 삼광조와 나는 것의 끝장 판인 참매를 다뤘다. 비행하는 방향을 가늠하기 힘들다는 카메라맨의 푸념도 무시한다. 크기가 작고 군집을 이루는 놈들을 좋아하는 피디는 개미로 다큐를 만들더니 바퀴벌레에도 도전했다. 혐오스러운 걸 누가 보겠느냐고 주위에서 걱정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 선배는 개체와 개체 사이의 관계에 관심이 많다. 한국에는 이미 사라졌다는 야생 호랑이를 10년 넘게 쫓아다닌 선배도 있었다. 그 선배는 퇴사했는데 지금까지 야생 호랑이를 찾아다닌다고 한다.

이 정도면 피디가 아이템을 찾는 게 아니라 아이템이 그 피디에게 찾아오는 게 아닐까.

작품에는 만든 사람의 개성이나 취향, 가치관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니까 만들고 나면 부끄럽고 숨고 싶다. 나는 더 심한 편이라서 만든 사람의 품격까지 묻어나온다고 생각한다. 무엇에 관심이 있고 앞으로 어떻게 살겠다는 포부까지도 보인다. 그것을 말하는 처음이 소재다. 소재가 고갈됐다는 것은 삶이 메말라간다는 증거다. 피디에겐 그렇다. 늘 생각한 것에서 소재를 찾기도 하지만 불현듯 생각난 것도 결코 그 사람이 살아온 궤적이나 생각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나는 수학에 관해서 두번 만들었고 이번에는 물리에 관한 다큐를 만들고 있다. 그 아이템은 어떻게 나를 찾아왔을까. 누군가 내가 택한 소재를 가지고 나의 일면을 짐작하리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부끄럽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김형준 교육방송 다큐멘터리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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