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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빼앗긴 다큐에 ‘봄’은 오는가

등록 2013-04-11 19:44

김형준의 다큐 세상
촬영을 다니다 보면 <교육방송>(EBS)이 국영방송이냐 공영방송이냐 물으시는 분들이 있다. 단어의 생김새가 비슷하니 의미가 헷갈리기도 하겠다 싶다. <한국방송>(KBS)도 한때 국영방송이었다가 공영방송으로 바뀌었다. 옛 기억이 강한 분들은 혼란스러울 법하다. 둘 다 정부 지원금이나 수신료를 재원으로 삼으니 방송사의 겉모양만 보고 가려내기도 쉽지 않다.

국영방송과 공영방송은 주인이 다르다. 국영방송의 주인은 국가이고, 공영방송의 주인은 국민이다. 방송 프로그램은 전국의 모든 거실에 앉아 있는 시청자들에게 직접 전달된다. 일방적이다. 그래서 공공재라 불린다. 국가에만 맡기는 것은 위험하다고 여긴 많은 나라들은 그 권리를 국민에게 돌려줬다. 공영방송이 태어난 배경이다. 영국의 <비비시>(BBC)나 일본의 <엔에이치케이>(NHK), 오스트레일리아의 <에이비시>(ABC)가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에는 한국방송과 교육방송, 그리고 <문화방송>(MBC)이 있다. 모두 국민이 주인인 방송사다.

요 몇 년 사이 주인이 아닌데 주인 행세를 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주로 다큐멘터리를 두들겨 팼다. 다큐가 가장 말을 안 들은 모양이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뻣뻣이 목을 세운다고 여겼다. 입을 틀어막고 발길질을 해도 말을 듣지 않자 결국은 거리로 내쫓았다. 시청률이 나오지 않는다는 핑계로, 시의적절하지 않다는 이유로 다큐 프로그램들이 줄줄이 폐기됐다. 나중에는 예의상의 사유마저 없었다. 비상식적인 일도 반복되다 보니 상식이 될 지경이었다. 그러나 화무십일홍이다. 무엇을 상상하든 늘 그 이상을 보여주던 무리들은 결국 사라졌다. 억울하게 일자리를 빼앗긴 피디들도 새봄에 맞춰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희망을 품어볼 즈음에 우려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교육방송에서 한창 제작중이던 다큐가 중단됐다. 특별한 까닭 없이 담당 피디가 다른 부서로 발령 났다. 제작중이던 다큐는 <나는 독립유공자의 후손입니다>였다. 제목이 역설적이다. 공이 있는 자의 후손이라면 마땅히 그에 맞는 대우를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뜻이다. 더욱이 그 공이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운동이라면 다큐의 의미는 더 깊어진다. 피디가 본 후손들의 생활은 비참할 지경이었다. 독립운동을 하느라 가정을 돌보지 못한 터라 자식들 삶은 늘 빈곤했고 지금도 다르지 않다. 이 다큐의 기획안은 회사의 공식적 절차를 거쳐 승인받았고 오래전 촬영이 시작됐다. 담당 피디는 수년간 <지식채널 이(e)>로 다양한 사회적 이슈를 다룬 이이기에 동료들의 기대도 컸다. 더욱이 요즘은 방송에서 보기 힘든 현대사에 관한 소재라 더욱 주목받았다. 삼일절이 무엇을 기념하는 날인지도 모르는 절반의 중·고등학생을 위해,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을 알아야 하는 국민의 권리를 위해 꼭 필요한 프로그램이었다. 공영방송사라면 주인인 국민을 위해 당연히 만들어야 할 다큐다.

또다른 공영방송사에서는 신설되는 현대사 다큐 때문에 진통을 겪고 있다. <역사스페셜>이 그러했듯 통상 역사 다큐는 방송사 내 피디들이 만드는 것이 관례인데 회사는 이를 깨고 외주제작으로 강행하겠다고 한다. 미묘한 시점이라 군사정권을 미화시키는 것이 아니냐는 걱정도 크고, 상대적으로 제작 방향을 조정하기 쉬운 외주제작으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니냐는 근심도 많다. 모두 공영방송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생겨난 일이다. 봄 대신에 다시 겨울이 오지 않을까 하늘을 보게 된다.

김형준 교육방송 다큐멘터리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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