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에스비에스>(SBS)가 개국하고 <모래시계>(사진)가 한창 방송되던 시절, 내가 살던 부산에는 에스비에스 채널이 나오지 않았다. 교실과 엄마들 부녀회에서는 “서울에 가면 <모래시계>라는 드라마가 있는데, 그게 방송될 때는 길거리에 사람이 안 다닌다”는 신비로운 소문이 떠돌았다. 인터넷도 없던 때니까 그 대단하다는 드라마는 소문 속 명작일 뿐이었다.
몇 주 지나 비디오 가게에는 공테이프에 복사된 <모래시계>가 1편부터 입고되기 시작했고, 그 테이프들은 없어서 빌리지 못하는 열풍을 일으켰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이 아니라, 자동차로 다섯 시간 거리인 부산에서 있었던 일이다.
<첫사랑>(1996년)은 마지막회 시청률이 69%였다. 에이치오티와 젝스키스가 세상의 전부 같았던 교실이 실제로 있었고, 그건 지난해 <응답하라 1997>에서 애틋하게 묘사됐다.
초등학교 친구들 모임에 나가면 <모래시계>나 <가요톱10> 같은 공통의 화제는 더는 나오지 않았다. 시중은행 과장이 된 친구는 <썰전>에 열광하고 있었다.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은 친구는 <탑기어 코리아>와 <나인>을 즐겨보고, 대학교 때 나에게 뜬금없이 김밥을 싸준 친구(남자다)는 <마스터셰프 코리아>와 <히든 싱어>가 제일 재미있다고 했다. 그들의 엄마들은 <황금알>과 <동치미>를 ‘본방사수’하고, 여자 친구와 아내들은 <아빠 어디 가>와 <왕좌의 게임>(미국 드라마)을 ‘다시 보기’로 챙겨보고 있었다. 건축가 친구는 그 모든 게 뭔지 잘 알지 못했다. 대부분의 프로그램들은 케이블과 종편, 외국에서 제작된 것들이다.
포털사이트에서는 매일 아침, 간밤에 대단한 일이라도 있었던 듯 전날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을 놓고 호들갑을 떨지만, 전통적 황금 시간대였던 평일 밤 10~12시의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 가운데 시청률이 10%가 넘는 것은 이제 서너 개밖에 없다. 3년 전만 해도 이 시간대에 시청률 10%는 폐지할까 말까의 기준선이었다. 하지만 요즘 10%를 넘기면 참 기쁜 일이다. 지상파 경영진들이 코웃음을 쳤던 종편 프로그램들은 마침내 이 시간대 총 시청률의 10% 정도를 가져갔다. 대기업의 지원을 앞세운 <티브이엔>(tvN)과 <엠넷> 같은 케이블 채널들의 약진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제 프로그램은 정말 많다. 종편과 케이블 채널들은 평균 시청률 2% 같은 아주 작은 파이만으로도 제작을 감행한다. 정부는 미디어법을 개정하면서 이렇게 조그마한 방송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간접광고와 각종 협찬에 대한 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예능 프로그램의 창달과 소수자 인권의 보호, 문화적 취향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취지’는 아니었다. 목적이야 뻔한 데 있었다. 그러나 그 정책은 엉겁결에 프로그램을 다양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제 앞뒤에 붙는 광고가 신통치 않아도 프로그램들은 살아남을 수 있다. 프로그램은 더는 전체 연령이나 성별을 아우르지 않아도 된다.
방송도 이제 다품종 소량 생산 시대가 됐다. 보편에 대한 강박은 촌스러워 보일 지경이다. 새롭고 특이한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제작자들은 무수한 프로그램들을 론칭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볼 만큼 대중에겐 여유가 없다. 너무 볼 게 많지만 함께 열광할 것이 없는 시대, “어제 그거 봤어?”라는 대화가 점점 무의미해지는 시대가 됐다.
류호진 한국방송 예능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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