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부터 한국 코미디는 ‘개그맨 전성시대’로 바뀌었고, 90년대 이후로는 개그맨들이 중심이 되는 예능 프로그램이 방송의 꽃으로 자리잡았다. 2006년 시작한 문화방송 <무한도전>은 특이하고 황당한 도전을 벌이는 게임 방식으로 인기를 끌며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들이 쏟아져 나오는 계기가 됐다. 문화방송 제공
한국 코미디 탄압과 천대의 70년(2)
코미디·예능은 이제 사람들의 일상에 들어와 있다. 성과 정치라는 금기의 영역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한국 코미디 70년은 하지만 탄압과 천대의 시절이 훨씬 많았다. 김희갑에서 김구라까지, 우리를 웃기고 울린 그 역사를 되돌아봤다.
짧은 호흡과 유행어의 힘, ‘개그’의 시대
시대의 조류는 80년대부터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박정희의 뒤를 이은 전두환이라고 독재정권이 아니었던 것은 아니지만, 스리에스(3S) 정책과 장발 단속 폐지, 통금 해제 등의 유화책을 들고나온 5공에서는 코미디언들의 운신의 폭이 조금은 더 넓어졌다. <문화방송> <일요일 밤의 대행진>은 뉴스의 형식을 빌려 시사풍자를 시도했는데, 진행을 맡은 김병조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가 비아냥과 풍자를 잔뜩 담아 던지는 일련의 멘트 “지구를 떠나거라” “먼저 인간이 되거라” “교양 있게 놀아라” 등은 여지없이 유행어가 되었고, 억눌려 있던 풍자 코미디의 가능성이 아주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문화방송>에 김병조가 있었다면 <한국방송>에는 김형곤이 있었다. <유머 일번지>에서 김형곤이 선보인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이나 ‘탱자 가라사대’의 정치풍자는 그 수위와 적나라함이 훨씬 더했던 터라, 김형곤은 국가안전기획부의 감시 전화를 받아가며 연습을 해야 했다.
김병조의 “지구를 떠나거라”는 풍자 코미디의 가능성을 보였다
김형곤의 ‘회장님’ 풍자는 수위가 훨씬 더했다 개인의 욕망을 담은 개그도 떴다
처음엔 호통을 치는 박명수였고 그 뒤는 독설의 아이콘 김구라였다 마침내 적나라한 정치와 성을 다룬 코미디가 우리 앞에 도착했다
더 솔직하고 자유로워지고 싶은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다 안타깝게도, 이런 변화에 기존 코미디언들은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김병조, 김형곤, 전유성, 임하룡, 이홍렬 등 새롭게 등장한 신인들이 선보인 것은 그 형식부터 조금은 달랐다. 호흡이 길고 서사구조가 중요시되는 정통 코미디와는 달리, 신인들은 좀더 짧은 호흡의 농담과 유행어들을 전진 배치시켰다. 코미디 프로그램은 점차 기존의 스튜디오 코미디를 벗어나, 방청객들로부터 실시간으로 반응을 끌어내는 공개 코미디의 방향으로 변하고 있었다. 전유성은 자신과 같은 이런 부류를 ‘개그맨’이라 칭했고, 개그맨들은 무섭게 80년대를 집어삼켰다. 물론 이때도 정통 코미디가 설 자리가 사라졌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80년대가 시작되기 무섭게 무대에선 이미 유명했던 코미디언 이주일이 티브이 코미디 시장에 진출해 ‘황제’의 칭호를 얻은 뒤였다. 한국 티브이 코미디의 1세대들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말하자면 아주 과격한 방식으로, 한국 코미디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셈이다. 아마 새로운 세상에 대한 대중의 열망이 터져 나가기 직전이던 80년대의 반영이었으리라. 오랜 독재를 지난 뒤 다시 들어선 정권이 또 군부 독재 정권이라는 아이러니는 젊은이들로 하여금 기존과는 다른 무언가를 열망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김형곤의 정치풍자 코미디는 정권 차원의 압력으로 인해 금방 폐지가 되거나 풍자의 수위를 대폭 낮춰야만 했다. 시청자들의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던 김병조 또한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 전당대회에 불려가, 전달받은 원고를 그대로 읽었다가 방송 생활을 접어야 했다. 하필이면 6월 항쟁이 일어났던 87년 6월10일, 그가 읽어야 했던 원고는 다음과 같았다. “민정당은 국민에게 정을 주는 당이고, 통일민주당은 국민에게 고통을 주는 당이다.”
코미디와 예능의 만남, 개그의 진화는 계속
정권이 바뀌고, 시대가 변하면서 90년대의 공기는 사뭇 달라졌다. 민영방송 <에스비에스>가 개국했고, 과거의 민주투사가 대통령이 되어 ‘문민정부’를 출범시켰으며, 경제는 호황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90년대 코미디·예능의 맨 앞자리엔 주병진이 있었다. <일요일 밤의 대행진>의 후신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사회를 맡은 주병진은, 기존의 프로그램에서 보기 어려웠던 다양한 포맷을 실험했다. 매주 다른 분야의 전문가를 초빙해 사회자들이 직접 배워보는 인포테인먼트(‘인포메이션’과 ‘엔터테인먼트’의 합성어. 지식 전달형 오락) ‘배워봅시다’ 코너, 이경규의 몰래카메라, 콩트 코미디와 1인 토크쇼가 모두 한 간판 아래 뒤섞여 있던 초창기 <일요일 일요일 밤에>는 실로 ‘버라이어티 쇼’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쇼였다. <자니 카슨 쇼>로 대표되는 미국식 토크쇼 프로그램 시스템을 한국 환경에 이식한 <일요일 일요일 밤에>는 오늘날 한국 티브이 예능의 분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론 새 시대의 도래를 확신한 대중의 안도감과, 더 이상 거대담론에 지배받는 대신 개인의 삶에 집중했던 ‘엑스(X) 세대’의 등장은 색다른 개그맨들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서경석과 이윤석은 각각 서울대와 연세대 출신이라는 것을 앞세운 엘리트 개그맨으로 대중에게 선보여졌고, 콩트 코미디보다는 토크에 능한 김국진, 김용만, 박수홍, 김수용의 이른바 ‘감자골 사인방’이 새로운 시대의 얼굴이 되었다. 부조리한 농담과 빠른 말재간으로 사람의 혼을 빼놓는 신동엽, 압도적인 무대장악력으로 좌중을 사로잡는 이영자, 강호동이 무섭게 치고 올랐다. 세대교체는 70년대에서 80년대로 넘어오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민주화되고 경제적으로 부유해진 사회에선 더 이상 웃고 즐기는 것이 사치가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모두 아는 것처럼 아이엠에프(IMF)가 왔다. 처음엔 이 힘든 시기를 뭉쳐서 이겨내자는 착한 예능이 주류를 이뤘다. 이경규와 함께 ‘양심냉장고’를 성공시켰던 김영희 피디(PD)는 김국진, 김용만과 함께 <칭찬합시다>를 성공시켰고, 그 성공은 <느낌표!>로 이어졌다. 기가 세지 않아 주목을 받지 못했던 유재석이 대중의 앞에 전면으로 나섰고, 한국의 대중은 독서 권장 캠페인이나 고등학교 0교시 폐지와 같은 사회적 이슈로도 예능을 만들 수 있단 사실을 학습했다. 하지만 아이엠에프를 극복한 이후에도 각자도생의 시간은 나아지지 않았다. 다 같이 힘을 합쳐 착하게 살면 사는 게 나아질 것만 같았는데, 경제 지표는 상승하지만 내 삶은 그대로인 시간이 너무 길었던 것이다. 그러자 점차 개인의 욕망을 보다 더 솔직하게 반영하는 개그맨들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처음엔 호통을 치는 박명수였고, 그 뒤를 독설의 아이콘 김구라가 이었다. 그 전까진 모두가 앞에선 쉬쉬했던 연예인의 가십이 제일 먼저 예능의 소재가 되어 도마 위에 올랐다.
그리고 마치 <느낌표!>가 꼭 웃기는 소재가 아니라도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 수 있었던 것처럼,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코미디·예능의 소재가 되었다. 정해진 포맷을 파괴한 <무한도전>(MBC)은 댄스스포츠, 프로레슬링과 같은 도전과제나, 재개발지구 강제철거와 같은 사회적 의제, 유년의 추억이 없는 박명수에게 유년을 돌려주자는 정서적 만족감까지 예능이 가 닿을 수 있는 영역을 모두 탐사했다. 이러한 실험의 성공은 코미디·예능이 오랜 세월 갇혀 있었던 장르적 한계를 부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의 가장 적나라한 욕망을 담은 정치와 성을 다룬 코미디·예능이 우리 앞에 차례로 도착했다. 해방 이후 처음으로, 코미디가 다루지 못할 분야가 없어진 것이다.
흔히들 티브이를 ‘당대 대중의 무의식의 반영’이라고 한다. 그 말이 옳다면, 한국의 코미디·예능이 지금과 같이 위상이 올라간 것은 보다 더 솔직하고 제약 없이 자신이 욕망하는 바를 말할 수 있게 된 한국 근·현대사의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한 가지 희망을 시사한다. 높은 이들이 시대를 마냥 거꾸로만 돌리려는 하수상한 세월일지라도, 더 자유로워지고 싶고 더 많이 웃고 싶어 하는 시대의 거대한 흐름을 막을 수는 없을 거라는 희망 말이다.
이승한/티브이 칼럼니스트
김형곤의 ‘회장님’ 풍자는 수위가 훨씬 더했다 개인의 욕망을 담은 개그도 떴다
처음엔 호통을 치는 박명수였고 그 뒤는 독설의 아이콘 김구라였다 마침내 적나라한 정치와 성을 다룬 코미디가 우리 앞에 도착했다
더 솔직하고 자유로워지고 싶은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다 안타깝게도, 이런 변화에 기존 코미디언들은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김병조, 김형곤, 전유성, 임하룡, 이홍렬 등 새롭게 등장한 신인들이 선보인 것은 그 형식부터 조금은 달랐다. 호흡이 길고 서사구조가 중요시되는 정통 코미디와는 달리, 신인들은 좀더 짧은 호흡의 농담과 유행어들을 전진 배치시켰다. 코미디 프로그램은 점차 기존의 스튜디오 코미디를 벗어나, 방청객들로부터 실시간으로 반응을 끌어내는 공개 코미디의 방향으로 변하고 있었다. 전유성은 자신과 같은 이런 부류를 ‘개그맨’이라 칭했고, 개그맨들은 무섭게 80년대를 집어삼켰다. 물론 이때도 정통 코미디가 설 자리가 사라졌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80년대가 시작되기 무섭게 무대에선 이미 유명했던 코미디언 이주일이 티브이 코미디 시장에 진출해 ‘황제’의 칭호를 얻은 뒤였다. 한국 티브이 코미디의 1세대들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말하자면 아주 과격한 방식으로, 한국 코미디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셈이다. 아마 새로운 세상에 대한 대중의 열망이 터져 나가기 직전이던 80년대의 반영이었으리라. 오랜 독재를 지난 뒤 다시 들어선 정권이 또 군부 독재 정권이라는 아이러니는 젊은이들로 하여금 기존과는 다른 무언가를 열망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김형곤의 정치풍자 코미디는 정권 차원의 압력으로 인해 금방 폐지가 되거나 풍자의 수위를 대폭 낮춰야만 했다. 시청자들의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던 김병조 또한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 전당대회에 불려가, 전달받은 원고를 그대로 읽었다가 방송 생활을 접어야 했다. 하필이면 6월 항쟁이 일어났던 87년 6월10일, 그가 읽어야 했던 원고는 다음과 같았다. “민정당은 국민에게 정을 주는 당이고, 통일민주당은 국민에게 고통을 주는 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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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한/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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