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희 기자의 맛있는 TV
<워킹 데드> 시즌4가 중간 휴식기를 맞았다. 허한 마음만 남았다. 허셸의 죽음, 주디스의 실종 등 마지막 8부가 숨가쁘게 흘렀기 때문인 듯하다. 드라마가 재개되는 내년 2월까지 어떻게 기다릴까 싶다.
내가 지상파와 케이블에서 차고 넘치는 드라마들 중 미국 좀비물 <워킹 데드>에 빠진 건 시청자에게 질문을 던져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정상인도 죽으면 곧바로 좀비가 되는 상황에서 치사율 100%에 가깝고 전염성이 강한 독감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들이 있다. 치료약도 없다. 단순히 격리만 할 것인가, 아니면 죽여서 감염 확산을 막을 것인가. 가족의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어떤 선택이 옳을까. <워킹 데드>는 인간과 인간성에 관한 치열한 보고서를 써내려간다.
한국 드라마를 보자. 권력 다툼과 불륜, 출생의 비밀은 이제 빠뜨릴 수 없는 소재가 됐다. 똑같은 양념으로 맛의 강약만 조절한 드라마들이 재생산된다. <오로라 공주>(문화방송)에서는 대가족이 순식간에 뿔뿔이 흩어지고 죽어서 달랑 여주인공 한 명만 남거나(심지어 애견까지 급사했다), 10만 번의 절로 동성애자가 이성애자가 된다. <더 이상은 못 참아>(제이티비시)에서는 유체이탈을 보여주는 것도 모자라, 장례식 끝나고 매장하기 직전 관 속 사람이 눈을 뜬다. 둘 모두 아침 드라마가 아니라 ‘가족’을 타깃으로 저녁 7~8시대에 방송되는 일일극이다.
주말극 <왕가네 식구들>(한국방송2)은 한 발 더 나아간다. 휴일 저녁 8시대에 방송되는 가족 드라마인데도 당당한 불륜 커플이 등장하고, 거친 언어폭력에다가 최근에는 납치까지 곁들여졌다. 며느리 오디션 같은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 설정까지 있다. 한국방송은 매주 자체 최고 시청률을 올렸다고 자화자찬하지만, 낯 뜨겁기 그지없다. 동시간대 경쟁 드라마가 없는 상황에서 시청률 30%가 넘지 못하면 오히려 이상한 시간대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주말극은 한국방송의 간판 드라마다. 대표 얼굴로 <왕가네 식구들>을 내보내면서 수신료 인상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모습도 참 아이러니하다.
따뜻한 주말극으로 평가받는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나 <내 딸 서영이>에서도 막장 코드는 분명 있었다. 작은어머니가 어린 조카를 고아원 앞에 버렸다든지(<넝쿨째 굴러온 당신>), 멀쩡히 살아 있는 아버지를 죽었다고 말하는(<내 딸 서영이>) 설정이 등장인물간 갈등 유발 장치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갈등 전후의 과정이 설득력 있게 전개됐고, 인물들의 섬세한 심리 묘사에 의해 그릇된 행동에 대한 개연성을 부여했다. 밑도 끝도 없이 미워하거나 뜬금없이 용서하는 황당한 전개는 없었다. 방송사나 제작사, 작가들은 어쨌든 시청자들은 본다는 핑계를 대지만, 볼 게 없어 본다는 생각은 왜 안 하는지 모르겠다.
드라마는 상상을 담는 그릇이다. 그러나 상상에도 ‘정도’가 있다. ‘뒷담화’로 얘기하기에도 민망할 수준의 이야기를 과연 드라마로 꾸며 내보내는 게 적절한 걸까? 가뜩이나 괴팍하고 폭력적인 현실이 이어지는 마당에 드라마까지 ‘그 이상’을 보여줄 필요가 있을까 싶다. 현실에 질문을 던지면서 공감을 끌어내는 ‘착한 드라마’는 아닐지언정 인간 군상의 추악한 밑바닥만 한없이 드러내는 ‘나쁜 드라마’는 되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대중문화평론가들이 일부 드라마를 가리켜 “막장이라는 말로도 모자라다”며 혀를 내두르는 이유를 드라마 제작진이 곱씹어봤으면 한다. 현재의 시청층만 쫓다가 미래의 시청층을 죄다 놓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김양희 whizzer4@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