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경 기자
[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동물원 사육사와 동물들의 처지를 생각하다, 연애 못하는 슬픈 청춘에 눈물 흘리고, 민주당 장하나 의원의 ‘대통령 사퇴’ 발언도 되짚어볼 수 있는 잘 차려진 밥상 <한겨레> 토요판의 김민경입니다. 한 주의 ‘친절한 기자들’ 주제를 정하는 매주 수요일 오전이면 머리를 싸매곤 하다가 이번주에는 제가 나섰습니다.
스물한살 독립한 이후 텔레비전 없이 살았습니다. 대학생 때는 돈이 없어서, 취업 뒤에는 작은 원룸에 둘 곳이 없어서 못 샀습니다. 결혼할 때는 ‘텔레비전 볼 시간에 책을 보자’는 원대한 꿈을 안고 혼수 목록에서 과감하게 뺐죠. 그래도 <한국방송>(KBS) 수신료는 꼬박꼬박 냈습니다. 텔레비전이 없다는 신고를 차일피일 미룰 만큼 게으른 탓도 있지만, 광고에 휘둘리지 않는 공영방송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10일 한국방송 이사회가 수신료를 4000원으로 인상하는 안을 야당 추천 이사들의 반발에도 일방적으로 통과시켰다는 기사를 보고 휴대전화를 들어 123을 꾹꾹 눌렀습니다. 123은 1994년부터 수신료 징수업무를 위탁받은 한국전력공사 고객센터 번호입니다.
한국방송 수신료의 역사는 제 나이의 두 배쯤 됩니다. 1961년 12월31일 ‘서울 텔레비전 방송국’ 개국과 함께 시행령으로 100원씩 부과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내는 수신료 2500원은 1981년 컬러텔레비전에 적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수신료 징수 근거도 방송법에 규정돼 있고요. ‘텔레비전 수상기’를 가지고 있다면 텔레비전을 보든 보지 않든, (난시청 지역을 제외하고는) 잘 나오든 나오지 않든 내야 합니다. 참고로 디엠비(DMB)는 도입 당시 수신료 징수에서 정책적 판단으로 제외됐고, 별도의 부팅 없이 텔레비전 시청이 가능한 컴퓨터 모니터는 수신료 징수 대상입니다.
32년째 동결된 수신료를 생각하면 인상이 말도 안 되는 일은 아닙니다. 실제 한국방송 이사회가 보도자료를 내어 밝힌 수신료 인상 이유도 결국 ‘돈’입니다. 방송법상 수신료로 운영돼야 하지만 광고 수입이 더 많아 시청률 경쟁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공영성이 훼손된다는 논리지요. 지난해 한국방송의 수입 1조5680억원 중 수신료는 5851억원(37%)인 반면 광고비는 6236억원(40%)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수신료는 돈의 문제일까요?
법으로 수신료 징수를 규정하고 그에 따라 우리가 수신료를 내는 이유는 한국방송이 공영방송이기 때문입니다. 1999년 헌법재판소는 수신료 징수 합헌 판결을 내리면서 “공영방송사가 언론자유의 주체로서 방송의 자유를 제대로 향유하기 위해서는 재원조달의 문제가 결정적으로 중요하고…국가나 정치적 영향력, 특정 사회세력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하여는 적정한 재정적 토대를 확립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수신료는 일차적으로 돈이 아니라 방송의 공정성·독립성과 연관된 문제입니다. 한국방송의 공정성·독립성에 대해 안팎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최재천 민주당 의원실이 2월25일 박근혜 대통령 취임 뒤부터 10월19일까지 237일간 <9시 뉴스> 기사를 분석한 결과, 박 대통령 관련 기사가 처음 나온 날이 30일이었습니다. 8일에 한번꼴로 ‘국민 안전 위해 4대 악 척결’, ‘박 대통령 첫 해외 정상 외교’, ‘박 대통령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외교 돌입…창조경제 제시’ 등이 그날의 가장 중요한 일이라며 첫 기사로 보도됐습니다. 반면 ‘민주언론시민연합’의 방송모니터 보고서를 보면 이 기간 중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등은 축소되거나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한국방송 노동조합은 지난 10월30일 <9시 뉴스> 첫 기사인 ‘채동욱 전 검찰총장 가정부 폭로’가 <티브이조선>의 보도를 그대로 베꼈다며 보도국장의 해임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공영방송의 공정성·독립성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판단될 때 국민이 직접 이에 대해 의사를 밝힐 수 있는 카드가 수신료 납부 거부입니다. 수신료 인상안 발표 뒤 시민단체들이 ‘수신료 납부 거부 운동을 펼치겠다’고 한 것도 이런 맥락이지요.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 정연주 당시 한국방송 사장 퇴진을 요구하며 보수단체가 수신료 납부 거부 운동을 벌인 적이 있었습니다. 이 단체는 ‘매국방송 KBS 수신료 절대 안 내도 되는 길라잡이’를 만들어 담당자가 확인차 방문할 때 텔레비전을 치워놓으라고 권유하기도 했죠. 있는 텔레비전을 없다고 신고한 뒤 적발되면 1년치 수신료를 강제 징수 당할 수 있습니다. 이 참에 텔레비전을 없애거나, 최신 트렌드에 맞춰 티브이 수신 기능이 없는 컴퓨터 모니터로 인터넷 다시보기나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시는 건 어떨까요.
김민경 토요판팀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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