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왕가네 식구들’
김양희 기자의 맛있는 TV
순간, ‘좋다’는 의미에 혼란이 왔다. 길환영 <한국방송>(KBS) 사장이 지난주 주말극 <왕가네 식구들> 종방연에서 “막장 없는 좋은 드라마”라고 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다.
‘좋다’를 사전에서 찾아봤다. ①대상의 성질이나 내용 따위가 보통 이상의 수준이어서 만족할 만하다. ②성품이나 인격 따위가 원만하거나 선하다. ③말씨나 태도 따위가 상대의 기분을 언짢게 하지 아니할 만큼 부드럽다. 길 사장의 ‘좋다’는 도대체 어떤 의미였을까?
내용을 보자. 교감 선생님인 아버지는 보이는 대로만 믿는 가장이고, 어머니는 돈만 밝히며 첫째와 둘째 딸을 엄청 차별한다. 첫째는 사치를 일삼다가 남편 사업이 망하자 결혼 전 동거한 과거의 남자와 불륜을 저지른다. ‘불륜남’에게 사기를 당해 친정집까지 망하고 뒤늦게 남편에게 매달린다. 둘째의 남편은 돈 많은 여자를 만나 집을 나가고, 아내가 꾸민 납치 자작극 때문에 내쫓겨 거지 신세가 됐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부부 사이는 술 취한 아내를 덥쳐 생긴 늦둥이 때문에 회복된다. 셋째는 며느리 오디션까지 치르고 결혼하지만 시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다. 전 재산을 들고 다른 남자와 함께 도망갔던 시어머니까지 나타난다. 무늬만 가족극이지, 한껏 왜곡된 인간 군상들이 온갖 자극적 이야기를 펼친다.
인간관계 또한 씨족사회처럼 얽히고설켜 있다. 첫째 딸 남편의 과거 여자는 셋째의 시이모며, 둘째의 시누이는 올케의 삼촌과 하룻밤 실수로 결혼했다. 셋째의 시아버지와 둘째의 시어머니는 핑크빛 모드다. 이뿐인가? 거의 매회 싸우는 장면이 있다. 배신·불륜·폭언·의심이 범벅돼 있다가 마지막 1~2부를 남기고 켜켜이 쌓인 앙금이 엘티이(LTE) 급으로 풀린다. 수박·호박·광박·허세달·허영달·박살라·이앙금 등 이름부터가 1차원적인 캐릭터에, 1차원적인 내용 전개로 50부가 채워진다. 시대 풍자라 해도 카타르시스는 없고 헛웃음만 나온다. 동시간대 경쟁 드라마가 없는 상황에서 궁금증을 불러오는 자극적 에피소드가 많으니 시청률(최고 48.3%)은 당연히 높다.
드라마 평가의 잣대는 아주 주관적일 수 있어 대중문화 전문가들에게 의견을 구했더니 되돌아온 질문이 이랬다. “그분이 드라마를 안 보셨나요?” 아이들이 다니는 어린이집 엄마들에게도 물었다. “보고는 있지만 좋은 드라마는 아니다”, “억지스럽다”, “막장 같고 정신없다”고 했다.
하긴, 한국방송은 지난해 연말 이 드라마를 쓴 문영남 작가에게 작가상을 안겼더랬다. <소문난 칠공주> <조강지처클럽> <수상한 삼형제> 등 전작들을 자가 복제했을 뿐인데 상을 줬다. 시청률 지상주의다. 길 사장은 “<왕가네 식구들>은 수신료의 가치를 전하는 대표적인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이런 좋은 드라마를 계속 만들기 위해 수신료 인상에 힘쓸 것”이라고도 했으니 말 다했다. 현시대에 좋고 나쁨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상식과 비상식의 경계가 모호해졌다고 하나 도통 이해가 안 간다.
<왕가네 식구들> 제작사와 전속 계약을 맺고 있는 문 작가는 회당 5000만원가량을 원고료로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방송이 제작비의 일부를 대니까 수신료에서 상당 부분 지출된다고 하겠다. 가구당 수신료 2500원 중 고작 70원을 받아가는 <교육방송>(EBS)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간접광고 없이 어린이 드라마 <플루토 비밀결사대>를 제작하고, <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 등의 명품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낸다. ‘수신료의 가치’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공영방송이라면서 귀는 안 열려 있고 입만 열려 있다”는 한 평론가의 지적을 한국방송은 곱씹어보길 바란다.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사진 한국방송 제공
김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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