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정도전>의 작가 정현민씨가 23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 케이비에스(KBS) 미디어센터 작가실에서 황진미 평론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황진미가 만난 정도전 작가 정현민씨
국회 보좌관 출신 늦깎이 작가
철저한 고증으로 정통사극 열풍
가장 아끼는 캐릭터는 이인임
유연하고 상대 인정하는 정치력
정도전 ‘이상’ 마키아벨리보다 앞서
진정성 있는 정치인 모습 그렸다
국회 보좌관 출신 늦깎이 작가
철저한 고증으로 정통사극 열풍
가장 아끼는 캐릭터는 이인임
유연하고 상대 인정하는 정치력
정도전 ‘이상’ 마키아벨리보다 앞서
진정성 있는 정치인 모습 그렸다
정현민 작가는 <한국방송>(KBS)의 사극 <정도전>으로 단숨에 스타 작가로 자리잡았다.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10년 경력을 쌓은 그는 2009년 한국방송 극본 공모에 당선돼 나이 마흔에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평론가 황진미씨가 23일 서울 상암동 ‘케이비에스 미디어센터’에서 정 작가를 만났다. 드라마와 역사, 현실정치 등을 예리하게 파고들자, 정 작가는 “이렇게 긴장되는 인터뷰는 처음”이라며 연신 땀을 닦았다. 토·일요일 밤마다 시청자를 찾아갔던 <정도전>은 29일 종영된다. 편집자
황진미(이하 황) 시청자나 평단의 반응이 매우 좋다. 자평은 어떤가?
정현민(이하 정) 연출이나 연기도 좋았고, 정통사극을 보고 싶어 하는 시청자들의 요구에 부합했다. <정도전>은 정통사극이면서 미니시리즈 같은 빠른 전개로 젊은 감각을 추구했다. 오피니언 리더들은 열광하지만, 기존에 사극을 보시던 노인분들은 좀 어려워하시더라.
황 준비기간 4년에, 관련 책을 100권이나 읽었다고 들었다. 나도 책을 좀 찾아보니, 드라마가 역사적 사실에 매우 충실하더라.
정 <용의 눈물>막내 피디였던 강병택 감독이 4년간 구상한 기획이었다. 난 정도전을 잘 몰랐고, <용의 눈물>도 안 봤다. 작년 1월에 제안받고, 7월부터 대본 준비했다.
황 인물들을 선악의 구도가 아니라 각자의 대의와 이념을 지닌 존재로 그렸다. 캐릭터도 굉장히 입체적인데, 가장 아끼는 캐릭터는 누구인가?
정 이인임이다. 지금은 이인임처럼 유연하고 상대를 인정할 줄 아는 정치력을 지닌 보스가 드물다.
황 정치를 이해관계나 권력의지의 충돌로 그리지 않고 세계관의 격돌로 그렸다. 정치에 대한 긍정적 믿음이 있나 보다.
정 하나의 대의만 존재한다고 믿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국회에서 노동정책을 입안하는 보좌관으로 10년간 당을 가리지 않고 5명의 의원과 일하면서, 양쪽 이야기 모두에 귀 기울이는 무당파적 인간이 됐다. 난 고려 말에 새 나라가 세워져야 했다고 생각하지만, 정도전을 위인으로 그리고 싶진 않았다. 각자 진정성 있는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생각할 거리를 던지고 싶었다.
황 정도전, 이성계, 정몽주의 기묘한 삼각관계는 멜로드라마적 재미를 준다. 막판에 정몽주가 정도전을 치졸한 방식으로 죽이려는데, 공격받는 정도전이 오히려 정몽주를 걱정하지 않나. 그런 장면에서 어떤 이들은 ‘브로맨스’(브러더+로맨스. 남자들 사이의 사랑에 가까운 우정)를 발견하기도 하더라.
정 내가 속한 세대는 1980년대 홍콩 영화나 운동권 문화를 통해 남자들 간의 동지적 관계를 강하게 느껴왔다. 짧지만 운동권 문화를 접한 경험이 세상을 바꾸려는 이들의 정서를 드라마에 녹일 수 있게 해주었다. 드라마 제안받고 존경했던 운동계 대부를 찾아가 어떤 마음으로 혁명을 기도했는지 물어보기도 했는데, 혁명은 원래 감수성 있는 자들의 몫이다. ‘브로맨스’는 생각도 못했다.
황 세대차이 아니겠나. 초반에 드라마는 운동권 후일담 문학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시청자들은 정도전의 좌충우돌을 싫어하고 이인임에 매료됐다.
정 신진사대부들과 386세대가 겹쳐 보이는 건 자연스럽다. 난 초반에 정도전이 그렇게까지 비난받을 줄 몰랐는데, 대중의 정서가 많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황 정도전이 각성하는 귀양지 에피소드는 어떻게 구상한 건가?
정 실제로 정도전이 귀양지에서 사람들 모아놓고 자기가 뭘 하다 왔다고 일장 연설하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백성들 입장에선 황당하지 않았겠나. 지금도 국회에선 국민을 위해 싸운다고 생각하지만 국민들은 관심 없다. 양대 노총도 열심히 하지만, 상당수 조합원들은 자기 삶과 거리감을 느낀다.
황 정도전이 꿈꾼 신권의 나라는 조선 설계도에 반영되긴 했지만, 강한 왕권을 꿈꾸었던 이방원의 척살로 추동된 개국이니, 시작부터 반은 접고 들어간 셈이다. 결국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게 아닐까.
정 정도전은 성공한 인물이 아니지만, 민생을 우선시한 근본주의자로 기릴 만하다. 조선 개국은 그나마 피를 덜 흘린 혁명이었는데, 세련된 정치적 절차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정도전은 농본주의, 사대교린 등 합리적인 국시를 바탕으로 성리학적 이상 국가를 건설하려 하였다. 유럽의 마키아벨리보다 훨씬 빠른 것이다. 정도전은 개국에 안주하지 않고 끝까지 달려간 정치가로 감동적인 면이 있다.
황 새 왕이 아니라, 새 시스템을 꿈꾸는 게 핵심인데 지금에 대입하면 뭘까? 직접민주주의나 지방분권화, 시민참여협의체나 비정부기구(NGO)의 강화, 혹은 기본소득, 뭐 그런 것이려나?
정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대립 항이 아닌 새로운 시대정신이나 그룹이 등장하길 바란다. 그런 염원이 <정도전>의 인기의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황 원래 노조 간부를 하지 않았나? 19살 때 창원공장에서 일했었다고.
정 내가 부산기계공고를 나왔다. 국립으로 학비가 들지 않는 학교다. 고3 때 현장실습을 나가는데, 창원 효성중공업에 첫 출근 하던 날, 유리창이 다 깨져 있었다. 그때가 1987년 6월로, ‘789노동자 대투쟁’의 시작이었다. 1989년 8월까지 효성중공업을 다녔는데, 2년간 노조 집행부만 7번 바뀌었다. 당시 마창노련은 가장 강력한 노동운동 조직이었는데, 마창노련에서 지금으로 치면 ‘사수대’ 역할을 했다. 19살 때 사보에 콩트를 실었는데, 그걸 본 노조 간부가 찾아와 노보 편집위원을 맡겼다. ‘해돋이’라는 노보를 창간하고 편집위원으로 일했다. 1989년에 효성중공업이 파업을 오래 했는데, 나는 그때 대자보 작업을 하면서 야간 입시학원을 다녀 1990학번으로 대학에 갔다. 당시 노조에서 핵심이었던 간부는 후에 사노맹 사건으로 재판을 받았다. 난 대학 졸업하고 한국노총 부산지역본부에 있다가, <매일노동뉴스>기자로 일하다 국회에 들어갔다. 난 국회가 아닌 노동판을 고향으로 느낀다. 기회가 닿으면 내 경험을 살려서 1970~80년대 본격 노동드라마를 꼭 써보고 싶다.
황 또 하나의 <모래시계>가 될 수도 있겠다. 기대한다.
글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chingmee@naver.com 인터뷰 도움 남지은 기자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