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로 대변되는 이들의 마음을 보듬는 프로그램들이 최근 쏟아지고 있다. ‘미생’. 티브이엔 제공
미생·갑과을·렛잇비 등
드라마·예능·광고 속 ‘을’들의 현실
작위적 해피엔딩 대신 담담히 그려
라면상무에 치이고, 사모님에 받히고
‘갑의 횡포’ 공분 느낀 시청자 공감
“노력한 사람이 인정받기를 바라”
드라마·예능·광고 속 ‘을’들의 현실
작위적 해피엔딩 대신 담담히 그려
라면상무에 치이고, 사모님에 받히고
‘갑의 횡포’ 공분 느낀 시청자 공감
“노력한 사람이 인정받기를 바라”
“인간 딱 두 가지야. 갑과 을. 나는 내 아들이 갑이면 좋겠어.”
2012년 방영한 드라마 <아내의 자격>(제이티비시)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극중 기자인 한상진은 사교육 실태를 고발하면서 “어른들 줄세우기에 놀아나는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보도하지만, 실상은 그 자신도 세상의 ‘갑’으로 살고 싶어한다. 각계각층을 두루 만나본 그는, ‘을’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잘 알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에선 그동안 주로 ‘갑’을 좇는 사람들에 초점을 맞췄다. 고생 끝에 성공한 얘기는 희망을 준다. 그런데 최근에는 ‘을’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드라마와 예능, 광고에서도 쏟아진다. ‘을’의 성공담이 아니라, 일상을 담담히 보여주며 휑한 마음을 보듬는다.
■ TV ‘을’을 품다. 왜?
드라마 <미생>(티브이엔)이 대표적이다. <미생>은 프로 바둑기사를 꿈꿨지만 프로 입단에 실패한 장그래가 고졸 검정고시 출신으로 대기업 상사의 2년차 계약직 직원이 되어 일어나는 직장 생활의 애환을 그린다. 개그프로그램 <코미디 빅리그>(티브이엔)에서는 ‘갑’과 ‘을’의 신분이 수시로 바뀌는 ‘갑과 을’ 꼭지가 인기를 끌고, <개그콘서트>(한국방송2)의 ‘렛잇비’는 직장인의 비애를 노래로 부른다. 최근까지 노출된 한 피로회복제 광고에서는 엘리베이터에 탄 택배기사의 땀냄새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코를 막고 피하는 얘기가 먹먹함을 선사했다.
‘을’의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직장인 드라마의 원조로 꼽히는 1987년 <티브이 손자병법>을 시작으로 <막돼먹은 영애씨> <샐러리맨 초한지> 등 직장 내의 차별은 드라마의 단골 소재다. <직장의 신>에서는 드라마에서는 이례적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끄집어내어 관심을 받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을’의 이야기가 다양한 장르에서 한꺼번에 쏟아져나오며 하나의 흐름을 만들고 있다. <미생>은 14일 방송이 시청률 5.1%(닐슨코리아)를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비정규직 문제 등 더 팍팍해진 직장인의 삶과 함께 최근 1년 사이 잇달아 터져나온 ‘을의 분노’에 주목한다. 2013년 대기업 상무가 기내에서 승무원에게 행패를 부린 것을 시작으로, 대기업 서비스센터 수리 기사들이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은 사건 등이 연이어 터지면서 많은 이들이 ‘갑의 횡포’에 공분했다. 텔레비전이 그런 현실을 반영하며 시청자의 공감을 사고 있다는 것이다. 윤석진 충남대 교수는 “대중문화는 현실적인 문제들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또 시청자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을 만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을’의 민낯이 달라졌다
실제로 요즘 텔레비전 속 ‘을’의 이야기는 예전과 많이 다르다. ‘을’의 대상부터 확대됐다. 단순히 직장 내 서열 관계에 멈추지 않고, <코미디 빅리그>의 ‘갑과 을’처럼 가전제품 수리 직원과 같은 ‘감정 노동자’들의 부당함도 정면으로 다룬다. 주인공 ‘을’도 좀더 ‘나’다운 평범한 인물로 설정하면서 공감의 폭도 커졌다. 같은 상사가 배경인 <티브이 손자병법>에서 주인공 유비는 유능한 대리였지만, <미생>의 장그래는 이른바 ‘스펙’이 한참 뒤떨어지는 계약직 직원이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600만명을 넘어서고 청년 둘의 하나는 백수(지난해 청년 고용률 56.8%)인 시대에서 이리저리 치이는 장그래는 우리네 모습이다. 이미 대리라는 직함을 단 유비보다, 신입사원의 고군분투에 더 크게 감정이입 한다. 박준화 <티브이엔> 피디는 “복사기 사용법도 몰랐던 장그래를 포함한 신입사원들의 시행착오 등이 많은 이들에게 자신의 신입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고 했다.
예전 드라마에선 직장 내 갈등을 그리면서도 ‘그래도 우리는 가족’이라며 매회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이미 갑의 횡포를 알고, 을의 아픔을 아는 2014년 시청자들에게 그런 ‘판타지’는 통하지 않는다. “버티는 것이 이기는 곳”이라는 <미생> 속 대사처럼 버티려고 고개를 숙이는 현실을 담담하게 그린다. <미생>의 장그래는 고졸 검정고시 출신에 낙하산, 계약직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오상식 과장은 일을 따내려고 친구의 ‘갑질’을 묵묵히 받아낸다. 똑부러지는 안영이도 여자를 괄시하는 부서에서 모욕을 당하면서도 참는다. 이전 주인공들이 불평등한 상황에 처하면 대부분 바로 감정적인 대응을 했던 것과 다르다.
장그래를 둘러싼 동료들의 성토 또한, “인턴이라도 되려고 대학 4년이 고등학교의 연장이었다”는 노력을 알기에, 마냥 힐난할 수도 없는 현실의 목소리다. <막돼먹은 영애씨>에서 힘없는 영업사원을 연기한 윤서현씨는 “시청자들이 어디서도 말 못하던 ‘을’의 경험을 드라마가 대신해주니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위로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 소시민에게 바치는 헌사
이런 현실적인 고단함 속에서도 희망은 심어둔다. <막돼먹은 영애씨>에서 외모로 차별받는 이영애는 회사의 꽃미남들과 사귀는 ‘연애 판타지’로 현실의 영애들에게 한 줄기 희망을 선사했다. <코미디 빅리그>의 ‘갑과 을’은 을이 다시 갑이 되어 복수하는 설정으로 통쾌함을 준다. 세상에 영원한 갑도, 을도 없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미생>은 장그래를 통해 ‘그럼에도’ 열심히 하면 인정받는다는 바람을 드러낸다. “가장 잘하는 건 노력”이라는 장그래는 엄청난 노력으로 ‘기적’을 일으킨다. 무역용어사전을 사흘 만에 외우고, 양복 하나만 입고도 냉동차 안에서 수시간을 버티며 묵묵히 일한다. 여기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솔함은 프레젠테이션에서 빛을 발해 결국 계약직 사원이 된다. 후배의 징계를 막으려 그렇게 싫어하는 전무에게 고개를 숙이는 오 과장에, 상사의 속마음을 헤아리고 후배까지 보듬는 김 대리까지. 영업 3팀을 보며 이런 상사, 이런 부하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더 간절해진다. 윤석진 교수는 “우리 사회가 그랬으면 좋겠다는 열망, 노력하는 사람이 인정받아야 한다는 바람이 영업3팀에 투영되는 것 같다”고 했다. 이승한 대중문화평론가는 “<미생>은 그래도 어디선가 자신의 몫의 삶을 살며,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는 소시민에 대한 헌사”라고 말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 당신 상사는 ‘미생’의 상사 중 어떤 타입?
‘을’로 대변되는 이들의 마음을 보듬는 프로그램들이 최근 쏟아지고 있다. ‘개그콘서트’의 코너 ‘렛잇비’. 한국방송2 제공
‘을’로 대변되는 이들의 마음을 보듬는 프로그램들이 최근 쏟아지고 있다. ‘코미디 빅리그’의 코너 ’갑과 을’. 티브이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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