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식. 사진 백종헌 <씨네21> 기자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기생집에 팔려간 동무 동녀를 구하기 위해 양반집 도령 귀동은 곱게 치마저고리를 차려입고 가채를 올리고 연지곤지에 분칠까지 해가며 여장을 한다.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다듬고 화장을 고치는 그 손길은 어찌나 천연덕스러운지. 김운경 작가의 사극 <짝패>(2011·문화방송)의 초반부, 귀동의 어린 시절을 연기한 최우식의 첫인상은 뻔뻔함이었다. 상대 역 천둥의 어린 시절을 연기한 노영학이 오랜 시간 아역배우로 활동하며 다져둔 탄탄한 발성과 정석에 가까운 감정 연기로 보는 이들을 사로잡았다면, 최우식에겐 도대체 어디서 저런 물건이 튀어나왔나 싶은 발랄함이 있었다. 앳된 발성에 장난기 어린 눈빛, 철부지 도령의 무책임한 말투와 어딘가 느긋해 보이는 인상까지, 그냥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딱 귀동인 것 같은 최우식을 보며 생각했다. 아, 저 사람은 어쩐지 실제로도 저렇게 유쾌한 사람일 것만 같아.
인터뷰를 다녀온 동료의 말을 들어봐도 최우식은 유쾌한 청년인 듯했다. 캐나다에서 7년을 살다가 배우가 되겠다고 무작정 한국에 들어왔다는 그는, 키가 큰 비결에 대해서는 “스트레스를 많이 안 받아서, 그러니까 약간 바보라서 키가 큰 것 같다”고 대답하고, 인터뷰 도중 대학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자리에서 배운 술자리 게임에 대해 열의 넘치게 설명하며 “한국 술 문화 정말 최고”를 외치는 사람이었다. 막 첫 작품을 마친 신인배우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느긋하고 여유로운 모습. 하기야, <짝패>의 오디션장에서 긴장을 푼답시고 심사위원들을 의식 안 하고 벌떡 일어나 털기춤을 춘 사람이라고 하니 말 다 했지 뭐. 유쾌한 일화들에 집중하느라, 나는 최우식이 노영학과의 화보 사진을 찍을 때 슬쩍 다리를 넓게 벌려 키 차이를 줄여 주었다는 의외의 속 깊음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버렸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을 것이다. <짝패> 이후 최우식이 맡았던 배역들도 넓게 보면 유쾌하고 철없고 발랄한 역할의 스펙트럼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에스비에스(SBS) <옥탑방 왕세자>(2012)의 눈치 빠르고 잔머리 잘 굴리는 내관 도치산이나, 한국방송(KBS) 시트콤 <닥치고 패밀리>(2012)의 빵셔틀 키보드 워리어 열우봉,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2013)의 흔한 동네 ‘고삐리’ 조연 윤유준 같은 역할들. 심지어 적당히 어두운 사연을 간직한 캐릭터였던 오시엔(OCN) <특수사건전담반 텐>(2011)의 박민호 형사조차 기본적으로는 잘 갖춰 입은 옷이 더러워질까 두려워 무균복을 입고 사건 현장 조사를 하는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최우식에게서 ‘까불거리고’, ‘머리를 잘 굴리며’, ‘도시 깍쟁이 같고’, ‘철이 덜 든’, ‘발랄한’, ‘소년’ 캐릭터를 기대했고, 최우식은 그런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연기로 화답했다.
본인도 퍽이나 만족스러워 보였다. <옥탑방 왕세자>가 끝난 뒤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최우식은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 지금보다 더 큰 역 맡으면 부담감 때문에 못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떠오르는 유망주 인터뷰 화보는 보통 멋있고 근사한 포즈로 장식되기 마련이지만, 최우식의 화보는 조금 달랐다. 반바지 정장에 나른한 표정으로 대낮의 거리를 활보하는 것도 모자라, 골목 모퉁이 건물 층계참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은 사진까지. 최우식은 청춘 스타의 아우라를 뿜어내는 인물이라기보단, 어쩐지 괜히 친한 척 다가가 밥이나 한 끼 사주고 싶은 귀여운 동네 청년 같았다. 너무 비슷한 색깔의 역을 반복해서 맡는 게 별로 좋은 신호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신인에게 확실한 자기 색깔이 있다는 게 어딘가.
최우식이 겉보기완 다르게 속이 무척 깊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에스비에스 리얼리티 프로그램 <심장이 뛴다>(2013~2014)였다. 문화방송 <진짜 사나이>를 의식한 티가 역력했던 <심장이 뛴다>는, 일군의 연예인들에게 소방대원 훈련을 시킨 뒤 실제로 소방서에 배치해 근무케 했다. 최우식은 막내 대원으로 활약했는데, 바늘공포증이 있어 링거 주삿바늘을 사람 팔뚝에 찔러 넣는 것도 못 하거니와 피를 보는 것조차 두려워 몸에 힘이 안 들어간다는 그는 대원으로 활약하기엔 너무 여려 보였다. 아니, 그런 트라우마가 있으면 차라리 하차를 하는 게 낫지 않나? 아무리 숭고한 일이라고 해도 그렇지, 견디지 못할 만큼 괴로운 일을 억지로 하는 게 커리어에 무슨 도움이 된다고. <심장이 뛴다>는 실제로 몇몇 출연진이 반복되는 악몽으로 고통받다가 제작진과 하차를 논의했을 만큼 숭고함만으론 버티기 어려운 프로그램이었다. 그랬으니, 바늘로 손가락을 찌르는 혈당체크조차 버거워하는 막내 최우식은 볼 때마다 안쓰러울 수밖에.
하지만 최우식은 어떻게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해냈다. 이송 중인 환자가 구토를 할 것에 대비해 비닐봉투를 챙기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토사물을 받아내는가 하면, 반복해서 링거 주사를 혈관에 꽂는 연습을 했다. 누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현장에서 제 할 일을 예민하게 찾아내고 묵묵히 일을 하는 막내. 최우식은 결국 프로그램이 종영될 때까지 제자리를 지켰고, 현직 소방대원들로부터 ‘스카우트를 하고 싶다’는 평을 받기에 이르렀다. “초반에는 피가 무섭다고 현장에서 징징거리기나 했다. 하지만 사람을 도우러 가서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최우식의 말을 들으며, 그동안 보아왔던 모습이 그의 전부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아주 당연한 사실이 새삼스레 다가왔다. 화보 촬영을 할 때 슬쩍 다리를 넓게 벌려 동생 노영학을 배려해줬다던 일화가 기억 저편에서 소환되는 순간이었다.
귀여운 동네 청년 같지만
속 깊고 쓰임새에 최선 다해
‘거인’ 이후 다시
철없음의 세계로 돌아왔으니
이보다 더 완벽한 소년과
성장에 대한 메타포가
또 있으랴 어쩌면 느긋함과 발랄함 뒤에 숨어 있었던 그의 진짜 모습은 예민함이었는지도 모른다. 최우식은 인터뷰에서 “캐나다에 뚝 떨어져 지낼 때 말이 통하지 않고 모든 것이 낯설어서 어떻게든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남으려 하루 종일 머리를 굴렸”던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린 나이에 이민 온 캐나다에 적응이 될 무렵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탓에, “어떨 땐 거기가 더 편하게 느껴”지는 애매한 환경. 마냥 철없고 밝아만 보이던 모습 뒤엔, 자신이 어떻게 해야 주어진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지를 살피는 예민함과,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되는 비슷한 역할, 똑같은 연기가 신물”이 나 연기를 그만둘까 고민하다가도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밝고 까불거리는 이미지를 찾으면 그 쓰임새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이 있었던 것이다. 최우식이 그간 보여줬던 발랄함, 유쾌함, 눈치 빠름, 뻔뻔함, 속 깊음, 소년, 예민함 등의 키워드들은, 무책임한 아버지와 무능력한 어머니 사이에서 스스로 고아가 되기를 선택해 보호시설인 그룹홈으로 들어간 소년 영재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거인>(2014)에서 한데 모여 폭발한다. 성당에선 착한 얼굴로 착실한 학생인 척하는 영재는, 학교에선 선생들의 눈치를 살피며 보호시설에서 훔쳐온 운동화를 판다. 무책임한 어른들에 의해 방기된 아이 영재에겐 살아남는 것조차 끊임없이 남의 눈치를 살피고 머리를 굴려 거짓말을 해야 하는 전쟁이다. 복잡한 상처와 울분을 속으로 꾹꾹 눌러 담은 채 위선으로 제 생존을 도모하는 영재라는 인물 속으로, 최우식은 두려움 없이 돌진했다. 그리고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되는” 역할에 질렸던 그는, 부산국제영화제에 처음으로 신설된 배우상인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하면서 존재를 증명하는 데 성공했다. 데뷔 4년차, 이름 대면 알 만한 드라마와 영화들에 얼굴을 비추던 그가 새삼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거인> 이후 최우식은 다시 익숙한 발랄함과 철없음의 세계로 돌아왔다. 문화방송 <오만과 편견>(2014)의 이장원 또한 사건 해결보단 칼퇴근에 목숨을 거는 날라리 검사다. 하지만 아마 이제 똑같은 연기에 신물이 난단 생각은 하지 않으리라. 이미 한 차례 자신의 가능성을 증명한 사람은 조바심을 내지 않는 법이니까. 관객이 언제까지나 철없을 것만 같던 겉모습에 홀려 있는 동안, 최우식은 성큼성큼 걸어 제 영토를 넓혀 놓았다. 그러고 보니 이보다 더 완벽한 소년과 성장에 대한 메타포가 또 있으랴. 어제 햇볕에 다르고 오늘 햇볕에 다르게, 언제 컸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사이, 소년은 자라서 어른이 된다.
이승한 티브이칼럼니스트
[잉여싸롱] 카트·거인·님아...강추 한국영화 3인방
속 깊고 쓰임새에 최선 다해
‘거인’ 이후 다시
철없음의 세계로 돌아왔으니
이보다 더 완벽한 소년과
성장에 대한 메타포가
또 있으랴 어쩌면 느긋함과 발랄함 뒤에 숨어 있었던 그의 진짜 모습은 예민함이었는지도 모른다. 최우식은 인터뷰에서 “캐나다에 뚝 떨어져 지낼 때 말이 통하지 않고 모든 것이 낯설어서 어떻게든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남으려 하루 종일 머리를 굴렸”던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린 나이에 이민 온 캐나다에 적응이 될 무렵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탓에, “어떨 땐 거기가 더 편하게 느껴”지는 애매한 환경. 마냥 철없고 밝아만 보이던 모습 뒤엔, 자신이 어떻게 해야 주어진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지를 살피는 예민함과,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되는 비슷한 역할, 똑같은 연기가 신물”이 나 연기를 그만둘까 고민하다가도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밝고 까불거리는 이미지를 찾으면 그 쓰임새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이 있었던 것이다. 최우식이 그간 보여줬던 발랄함, 유쾌함, 눈치 빠름, 뻔뻔함, 속 깊음, 소년, 예민함 등의 키워드들은, 무책임한 아버지와 무능력한 어머니 사이에서 스스로 고아가 되기를 선택해 보호시설인 그룹홈으로 들어간 소년 영재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거인>(2014)에서 한데 모여 폭발한다. 성당에선 착한 얼굴로 착실한 학생인 척하는 영재는, 학교에선 선생들의 눈치를 살피며 보호시설에서 훔쳐온 운동화를 판다. 무책임한 어른들에 의해 방기된 아이 영재에겐 살아남는 것조차 끊임없이 남의 눈치를 살피고 머리를 굴려 거짓말을 해야 하는 전쟁이다. 복잡한 상처와 울분을 속으로 꾹꾹 눌러 담은 채 위선으로 제 생존을 도모하는 영재라는 인물 속으로, 최우식은 두려움 없이 돌진했다. 그리고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되는” 역할에 질렸던 그는, 부산국제영화제에 처음으로 신설된 배우상인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하면서 존재를 증명하는 데 성공했다. 데뷔 4년차, 이름 대면 알 만한 드라마와 영화들에 얼굴을 비추던 그가 새삼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이승한 티브이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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