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우들이 2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케이블 채널 ‘투니버스’의 대표 에니메이션영화 ‘명탐정 코난’을 더빙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선혜, 강수진, 한신씨.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여전히 매력적인 성우의 세계
눈을 뜨고 보면 분명 ‘낯선 사람’인데, 감으면 ‘아는 사람’이 된다.
“어머, 코난” 반가움에 무심코 인사를 할 뻔했다. 21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위치한 케이블 채널 <투니버스>의 더빙실에선 <명탐정 코난 미방영 엑스파일 시즌3>(2월17일 방영)의 목소리 입히기가 한창이었다. 코난 김선혜부터 남도일의 강수진 등 익숙한 목소리의 성우 5명이 표정부터 손짓까지 섞어가며 ‘목소리 연기’에 몰입했다. 김선혜씨는 “더빙은 흉내를 내는 게 아니라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해내는 작업”이라고 했다.
지상파 3사 더빙 외화 2개뿐
1960~1990년대 초는 성우들의 전성시대였다. 라디오 드라마, 영화 더빙, 내레이션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활약했다. 십수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미국 드라마 <브이>의 다이아나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젠 목소리만 듣고 작품 속 인물을 떠올리는 일은 점차 줄고 있다. 지상파 3사(문화방송, 한국방송1·2, 에스비에스)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던 외화프로그램 <명화극장>(한국방송1)이 지난해 12월 ‘’폐지되면서 더빙으로 영화를 보는 프로그램이 지상파에서 자취를 감췄다. 외화 드라마도 영국드라마 <닥터후 시즌8>(한국방송1)과 중국드라마 <여상육정>(문화방송) 뿐이다. 1988년 데뷔한 강수진씨는 “지상파에서 더빙을 하는 영화와 드라마가 1990년에 견줘 10분의 1도 안 된다. 당시 20개 정도였던 라디오 드라마도 7~8개로 줄었다”고 했다.
교양과 다큐, 예능 분야에서 더빙이나 내레이션을 활용하는 프로그램이 늘어나고 있지만, 그 자리는 연예인의 몫으로 넘어가는 추세다. <한겨레>가 세어 보니, 지상파 3사에서 더빙이나 내레이션이 나오는 약 75개 프로그램 가운데 성우가 참여하는 건 절반 정도였다. 이근욱 한국성우협회 이사장은 “한때는 성우가 95%를 했는데 2007년 다큐 <차마고도>에서 최불암씨의 내레이션이 화제를 모은 이후 연예인들의 참여가 늘었다“고 했다.
제작비 부담에 자막방송 일반화
다큐 내레이션도 연예인 선호해
애니 등 어린이 프로 많이 출연
외화 주인공 맡으면 100만원 남짓
연예인 몸값 10분의 1도 안되지만
“흉내 아닌 캐릭터 창조” 자부심
작년 KBS 공채 경쟁률도 225대1
성우들의 위기는 1997년 아이엠에프 구제금융 위기 때 시작됐다. 강수진씨는 “당시까지 외화의 80%를 더빙했는데 아이엠에프가 오면서 제작비 부담을 줄이려고 자막 방송이 시작됐고, 2004년께 케이블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자막 방송이 일반‘’화됐다”고 했다. 실제로 <문화방송>은 2004년을 마지막으로 공채 성우를 선발하지 않았다. 지상파에서 4개나 있던 외화 프로그램도 2007년 <토요명화>(한국방송)를 시작으로, 2010년 <주말의 명화>(문화방송), 2011년 <영화특급>(에스비에스)이 차례로 폐지됐다. 방송사들은 케이블 채널에서 미리 보여주는 영화를 지상파에서까지 내보낼 필요가 있느냐는 고민이 있었다고 한다.
캐릭터의 새로운 창조
성우들의 주무대는 케이블 애니메이션, 스마트폰 게임 등으로 옮아갔다. 김선혜씨는 “영화 더빙과 다큐 내레이션은 ‘내가 인정받는구나’라고 느끼게 하는 상징적인 의미”라고 했다. 실제로 병아리 시절엔 엄두도 못 냈다. 강수진씨도 데뷔 6년 만에 지상파 영화의 단역을 맡았다.“88년 <한국방송> 공채로 데뷔한 후 전속기간 5년(현재는 2년) 동안에는 외화 더빙을 시키지 않았다”고 했다. 그만큼 성우의 연기는 치열한 준비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 배역을 넘어 배우까지 연구해야 한다. 강수진씨는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 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연기하려고 비디오테이프를 반복해 보며 1주일 동안 연구했다. 특유의 감탄사 등 언어 습관까지 공부해 반영해야 한다”고 했다.
외국 배우나 만화 캐릭터가 국내에 새로 소개될 경우, 누가 첫 번째로 하느냐도 중요하다. 최덕희씨에 이어 시즌2부터 <명탐정 코난>의 코난을 연기한 김선혜씨는 “시즌10까지 하고 있지만, 아직도 ‘코난하면 최덕희’라는 공식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처음 방영되는 영화나 드라마 시리즈가 알려지면 성우들 사이의 눈치씨움도 치열하다. 강수진씨는 “한국방송이 <반지의 제왕>(2001년 영화관 상영)을 방송한다는 소식에, ‘프로도’ 역할을 하려는 성우들의 문의가 빗발쳤다”고 했다. 그렇지만, 요즘 성우들은 새 작품을 시작하면서 ‘통과의례’를 치른다. 일부 시청자들이 ‘다른 경로’로 미리 작품을 봤기에, 한국 성우의 목소리에 반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지난해 5월 영국 드라마 <셜록3>(한국방송)은 주인공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항의가 쏟아져 방송사는 결국 더빙판과 한글자막판을 함께 제작했다.
여전히 지망생은 넘쳐
한국성우협회에 소속된 700여명 가운데 활발하게 일을 하는 경우는 300명 안팎이다. 한국방송과 투니버스 등 5곳에서 매년 공채를 선발한다. 2년 전속이 끝나면 프리 경쟁에 뛰어든다. 이근욱 이사장은 “성우의 10%가 1년에 억 단위를 벌지만 한푼도 못버는 이도 있다”고 했다. 성우는 몇명을 제외하고 ‘10분에 얼마’ 식으로 출연료를 받는다. 90분 영화를 기준으로 ‘에이급’이 100만원이 안된다. 한 성우는 “극장 애니메이션도 수천만원을 받는 연예인의 10분의 1도 안된다”고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인기 직업이다. 지난해 12명을 뽑는 <한국방송> 공채에는 2700명이 몰렸다.
<명화극장>까지 폐지되면서, 사회적 약자 배려와 우리말 지키기 차원에서 우리말 더빙이 더이상 위축되어선 안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성우 한신씨는 “시각장애인뿐 아니라 어린이나 노인 등 자막을 읽기 힘든 소수자도 배려해야 한다”고 했다. 강수진씨는 “가족영화 등 특정 장르에 대해서만이라도 더빙을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실제로 프랑스와 독일 등에서는 자국어 보호법에 따라 지상파 방송에서 자국 언어 더빙을 의무화하고 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맥가이버 하면 배한성, 샤론 스톤 하면 강희선…“전담 배우 갖는 게 꿈”
성우는 외국 배우들의 페르소나다. 목소리만 들어도 무릎을 치게 하는 성우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성우가 배한성씨. 그렇다 “날아라 가제트 팔”. 외화 드라마 <형사 가제트> 하면 그의 코맹맹이 목소리가 먼저 떠오른다. “우리 ○○○께서는 늘 말씀하셨지”라는 대사가 유행이 된 <맥가이버>도 배한성이다. 배한성씨는 최근 한 라디오에 출연해 “<형사 가제트> 더빙 당시 오리지널 배우의 말이 느리고 톤이 일정해 재미없었다. 고민 끝에 톤을 높여 지금의 목소리를 탄생시켰다”고 했다.
1990~2000년대 방영된 <엑스파일>의 남녀 주인공 데이비드 듀코브니와 질리언 앤더슨을 연기한 이규화씨와 서혜정씨도 배우들보다 성우가 더 생각나는 경우다. 서씨는 2009년 케이블채널 <티브이엔>의 <남녀탐구생활>의 코믹 내레이션으로 출연진보다 더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한 배우가 여러 목소리를 가지는 것에 대한 시청자 거부감 때문에 ‘전담 목소리’는 계속 늘어왔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를 전담하는 강수진씨 외에도 샤론 스톤은 강희선, 톰 행크스는 오세홍씨가 전담한다. 이정구씨는 리처드 기어, 브루스 윌리스, 조지 클루니 등 멋진 중년들은 모두 전담했다. 1980년대 미국 드라마 <전격 제트 작전>의 데이비드 해설호프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숨은 주인공도 있다. 지금은 장르를 넘나들며 배우로 입지를 굳힌 장광씨가 미키마우스의 한국 대표 목소리였다. 지금은 강수진씨가 뒤를 이어 20년째 미키마우스를 하고 있다. 강씨는 “디즈니는 다른 나라 성우 목소리도 본사에서 파일을 받아 오디션을 본 다음 직접 선택한다”고 했다.
남지은 기자
더빙은 보통 1주일 전부터 준비한다. 단순히 목소리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배우처럼 캐릭터 분석 등으로 새로운 인물을 창조해낸다.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맥가이버 하면 배한성, 샤론 스톤 하면 강희선…“전담 배우 갖는 게 꿈”
<맥가이버>의 주인공 맥가이버는 성우 배한성 씨가 담당한다.
유명 영화배우 샤론 스톤을 담당하는 성우는 강희선 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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