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 오취리, 헨리, 샘 해밍턴, 엠버(위 왼쪽부터 시계방향). 〈일밤-진짜 사나이〉에 출연한 외국인들은 어김없이 ‘떴다’. 이들의 인기는 “쟤들도 한국인 다 됐네”라는 안도와 쾌감에서 나온다. MBC 제공
[한겨레21]
샘 오취리·엠버·헨리 등 사랑받는 <진짜 사나이>의 외국인들…
‘군대무식자’에서 국민 통과의례 거쳐 ‘진짜 한국인’ 되다
샘 오취리·엠버·헨리 등 사랑받는 <진짜 사나이>의 외국인들…
‘군대무식자’에서 국민 통과의례 거쳐 ‘진짜 한국인’ 되다
세상에 많고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따져보면 결국 ‘고생담’이다. 예능을 포함해 TV에 나오는 수많은 프로그램도 그렇다. <무한도전>은 ‘사서 고생하는 이야기’이고, <해피선데이-1박2일>이나 <꽃보다> 시리즈는 ‘여행 가서 고생하는 이야기’, <해피선데이-슈퍼맨이 돌아왔다>는 ‘아이들을 보면서 고생하는 이야기’, <삼시세끼>는 ‘밥해먹느라 고생하는 이야기’다. 시청자는 주어진 미션을 수행하느라 애쓰는 인물들이 몸고생을 할 때는 웃고, 마음고생을 할 때는 같이 우는 재미로 예능 프로그램을 본다. <일밤-진짜 사나이>에서의 고생은 다른 예능 프로그램을 압도한다. 군대 이야기란 무덤에 흙이 덮이는 순간까지 하고 또 해도 더 하고 싶다는 고생담의 ‘끝판왕’이 아니던가.
모두 다 떴다, 외국인
고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듯한 길에 돌덩이를 올려놓으며 역경과 난관을 만드는 ‘지배자’가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PD가 그 역할을 한다. PD는 출연자들이 달성해야 하는 목표와 규칙을 정한다. 모든 출연자는 이 목표와 규칙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움직이며 자신의 고생을 숙명인 것처럼 해내야 한다. 그래야만 ‘리얼리티’가 성립한다.
2013년 3월 첫 방송을 시작한 <진짜 사나이>가 다른 예능과 가장 다른 점은, ‘입대’라는 방식은 제작진의 작품이지만 군대 안에서 이뤄지는 모든 일은 실제 존재하는 규칙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군대는 누구나 그 안의 규칙에 따라야 하는 통제된 집단이다.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랐다면 군대에서는 말하고 걷고 뛰고 씻고 먹는 사적 영역부터 실제 목표를 수행하기 위한 공적 영역까지 정해진 대로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출연자에게 명령하고 지시를 내리는 이는 쪽지나 카메라 뒤의 목소리가 아닌 빨간 모자의 조교다. 통제된 집단이라는 점은 이 프로그램의 리얼리티를 끌고 가면서 동시에 고생의 ‘끝판왕’을 향한 역경과 난관을 담당한다.
<진짜 사나이>의 고생담은 군대라는 통제된 세계의 규칙과 일상적인 세계의 규칙이 충돌하면서 만들어진다. 충돌의 크기와 고생의 정도를 극대화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출연진이다. 나이나 체격 조건, 배경, 경험 등이 제각각인 사람들로 구성해 다양한 충돌 상황을 만들어낸다. 군대를 다녀와 그 세계에 대한 이해는 있지만 체력이 따라주지 않는 배 나온 중년 남성이나 수많은 팬덤을 거느렸지만 ‘진짜’ 세상은 모르는 순수한 아이돌 그룹 멤버, 식스팩을 갖췄지만 알고 보면 허당인 미남 배우는 필수 멤버다. 두 번에 걸쳐 진행된 여군 특집은 모두 대성공을 거뒀다. 이유는 하나다.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출연진 중에 주목해야 하는 이들이 있다. 외국인이다. 시즌1부터 여군 특집, 그리고 지금 방영되는 시즌2까지 비슷한 유형의 출연진이 많았지만 한번 통한 카드가 계속 통한 건 외국인이 유일하다. 샘 해밍턴부터 헨리, 엠버, 그리고 샘 오취리까지 외국인 출연진은 매번 한 명씩 꼭 있었고, 모두 ‘떴다’.
한국 사랑을 증명하시오
외국인은 다른 출연진에 비해 몇 가지 고생의 요소가 더해진다. 듣고 말하는 기본적인 언어의 장벽에 군대에서 주로 사용하는 ‘다나까’ 화법과 한자어, 군대 용어 등이 장벽 위에 철망을 치고 있다. 행동도 쉽지 않다. 양반 다리로 ‘각을 잡고’ 앉는 좌식 문화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생고생’이다. 모든 외국인 출연자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해야 하는 ‘훈련병’이라는 최고난도 발음과 ‘좌향좌’나 ‘뜀걸음’ 같은 뜻을 알 수 없는 단어 앞에서 번민한다. 번민의 결과는 빨간 모자 조교들의 레이저 발사 눈빛과 열외, 그리고 웃음이다. 긴장되는 순간 툭 튀어나오는 헨리의 “탕수육”(탄약수)이나 엠버의 “잊으시오!” 같은 말실수는 얼차려와 함께 핵폭탄급 웃음을 선사한다. 외국인이어서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시청자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그들이 한없이 안쓰럽고, 또 웃긴다. 고생과 인기는 어느 정도 비례한다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법칙에 따라, 못해도 최소 ‘안타’는 칠 수 있는 조건은 기본으로 깔고 간다.
이 프로그램의 목표는 이름처럼 ‘진짜 사나이’가 되는 것이지만 이들에게는 또 하나의 목표가 있다. ‘진짜 한국인’이다. 한국어를 술술 잘한다고, 양반 다리쯤 아무렇지 않게 한다고 한국인이 되는 게 아니다. 군대라는 세계에는 나라를 불문하고 통용되는 그 세계만의 공통 법칙이 있지만, 그 기저에는 그 나라만의 문화가 있다. 한국 특유의 눈치 문화나 위계질서, 말하지 않아도 아는 정(情), 그리고 진정성의 문화를 단시간 내에 집약된 형태로 배울 수 있는 곳이 군대다. 외국인들은 군대에서 한국을, 또 한국인을 배운다.
입대 첫날, 궁금한 게 있으면 그때마다 손을 들고 거침없이, 아니 눈치 없이 질문하던 이들은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면 손을 드는 대신 눈치껏 하고 싶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간다. 군대가 재미있을 것 같다던 이들의 속마음 인터뷰는 점점 심경을 토로하는 눈물바다가 되어간다. 해맑은 표정과 대단한 친화력으로 군대의 모든 규칙을 의도하지 않게 ‘전복’하곤 했던 헨리가 훈련소를 떠나며 “정들었다”는 눈물을 보였을 때 수많은 기사는 그의 ‘인간적인 매력’을 부각시켰다. 외국인에 여성이기까지 했던 엠버는 놀라운 체력과 습득력에도 바느질을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바느질은 여자의 도리이거늘’ 같은 자막이나 ‘천생 여자’ 함께 ‘한국인-여자’로 인정받았다.
군대라는 공간의 특수성 때문에 이들에게는 ‘한국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수많은 기회가 주어진다. 샘 해밍턴이 한국인 출연자들도 몰랐던 ‘6·25전쟁 정전협정 60주년’을 기억해내거나 김치찌개를 싫어한다던 헨리가 정말 맛있다면서 ‘폭풍 흡입’할 때, 샘 오취리가 음정과 박자를 무시하며 군가를 부르면서도 시도 때도 없이 “군가를 불러도 되냐”고 물으며 ‘군가 사랑남’으로 거듭날 때 이들에 대한 호감도는 수직 상승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체험 기간이 끝나갈 때가 되면 ‘군대무식자’ 외국인이었던 이들은 어느새 ‘한국인’이라는 개념을 탑재한 ‘진짜 한국인’이 되어서 사회로 나온다. 이들의 변화는 시청자에게 일종의 쾌감을 선사한다. 이들이 그토록 되고자 하는 사람이 바로 한국인인 나 자신이라는 게 신기하고, 그들의 노력이 기특하며, 동시에 한국인임이 자랑스럽다. 시청자는 이들에게 “한국 사람 다 됐네”라는 최고의 칭찬과 함께 아낌없는 박수와 호감을 보내고, 타구는 담장을 넘어 ‘홈런’으로 이어진다.
“CF의 용사”로 보답받아
이들의 성공은 ‘진짜 한국인’에 대한 불편한 질문을 남기지만, 이 질문에 대한 대답과는 무관하게 <진짜 사나이>의 외국인 카드는 앞으로도 계속 유효할 것으로 보인다. 군가 <진짜 사나이>의 2절 가사를 살짝 바꿔보니 ‘진짜 한국인’의 주제가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은 노래가 탄생했다. “입으로만 큰소리쳐 한국인이라드냐, 너와 나 나라 지키는 결심에 살았다, 고생과 눈칫밥 속에 맺어진 전우야, 한국인의 자랑을 가슴에 안고, 사회로 돌아갈 땐 CF의 용사다.”
안인용 TV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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