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방송 ‘압구정 백야’의 한 장면. 화면 갈무리
남지은의 TV와 연애하기
6만7000원. 지난달 청구된 아이피티브이(IPTV) 사용료다. 방송연예를 담당하고 나서 지출 항목이 하나 더 늘었다. 다시보기 때문이다. 방송사마다 누리집에서 프로그램을 다시 볼 수 있는 아이디를 제공하지만, 될 수 있으면 사용하지 않는다. 컴퓨터에 코 박고 집중해서 보면 웬만한 작품은 다 재미있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드라마란 밥을 먹다가도 수다를 떨다가도 시선을 고정하게 만들어야 하는 법.
드라마를 보는 것도 사실 일이다. 대부분 주말에 일주일간 못 본 드라마를 챙겨본다. 등장하는 배우의 인터뷰를 앞두거나 관련 기사를 준비하면 1회부터 다시 몰아봐야 한다. 제아무리 미드(미국 드라마) 몰아보기 폐인이라도 엄두가 안 나는 작품은 있다. 이미 후반부를 향해 달려가는 긴 호흡의 대하 사극과 이른바 ‘막장’ 드라마가 그렇다.
특히 임성한 작가의 작품은 방송연예 기자로서 존재 이유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내가 왜 이러고 있나” 보는 내내 처지를 비관하게 된다. 방영 중인 <압구정 백야>는 심하다. 드라마가 이상한 건지, 내가 이상한 건지 보다 보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재미 여부는 둘째치고, 드라마는 나를 시종일관 이상한 사람이라고 꾸짖는다. 무속신앙을 믿지 않는 내게 “혼이 있으니 정성을 다해야 (신이) 감동한다”고 하고, 세상만사 모든 고민은 점쟁이가 해결해준단다. 등장인물들은 툭하면 점집에 가고 예지몽을 꾼다.
작가가 좋아하는 음식을 강요한다. <인어아가씨> 때는 딸기는 칫솔로 씻어 먹으라더니, 이제는 아침은 반드시 밥을 먹어야 한단다. 열심히 빵을 먹고 있는 손을 민망하게 만든다. 건강 프로를 보는 건지 드라마를 보는 건지 알 수 없게, 재료의 효능까지 세세하게 읊어댄다. 삶의 고민이 이 드라마에서는 다 부질없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너무 쉽다. <오로라 공주>에서는 유체이탈해서 죽더니 이번에는 조폭한테 한대 맞고 벽에 머리를 찧어 비명횡사했다. 스릴러도 아닌 가족드라마에서 벌써 두명이나 죽었고, 또 한명의 죽음을 예고했다. 드라마는 ‘작가 놀음’이라고도 하고, 작가의 가치관이 반영될 수는 있지만 임성한 작가처럼 주인공의 입을 빌려 시청자를 가르치려 드는 경우는 잘 없다. “필리핀 가정부를 구하면 애들 바로 영어 익힌다”는 식의 자신의 호불호가 정답인 양 주장하는 행위를 드라마마다 되풀이하고 있다. 127회에서는 “산티아고 순례길에 가고 싶다”는 말에 “큰 배낭 메고 걸으면 허리디스크 걸린다”고 단정하며 걷는 이들을 어리석은 사람인 양 치부해버린다.
작품마다 논란이 일어서일까. <압구정 백야>에는 “작가는 뼈를 깎는 고통으로 대본을 쓴다”는 대사가 나온다. <압구정 백야>도 뼈를 깎는 고통으로 썼으니 섣부른 비판은 하지 말라는 작가의 뜻으로 읽힌다. 그러나 나도 못지않게 뼈를 깎는 고통으로 봤다. 몰아보고 든 생각은 하나다. 대체 이 드라마는 뭘 말하려는 것일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도 좋은데, 주제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또 한가지. 다음달 아이피티브이 사용료는 얼마나 나올까.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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