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민의 팟캐는 남자
어떤 분야에나 척박한 땅에 처음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이가 있다. 국내에서 팟캐스트라는 척박한 땅에 처음으로 씨를 뿌린 이(방송)는 누구일까?
오늘 소개할 방송은 국내 팟캐스트의 ‘원조’ 격이라고 할 수 있는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이다. <검은 꽃>, <살인자의 기억법> 등의 소설로 유명한 김영하 작가는 최근 테드(TED) 강연과 <힐링캠프> 등의 방송 프로그램에도 출연하면서 대중들에게 한층 친숙해졌다. 김 작가는 2010년 1월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 방송을 시작으로 팟캐스트라는 땅에 발을 내디뎠다.
김영하 작가는 아직 국내에 팟캐스트가 자리잡기 전인 당시, 해외에서 처음 팟캐스트를 접하고 직접 방송을 내보낼 수 있다는 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곧장 팟캐스트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뒤, 노트북과 유에스비(USB) 마이크 등을 구입해 직접 집에서 녹음을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은 개인을 위한 녹음 시설도 늘었고 개인용 녹음 장비 역시 많이 보급돼 있지만, 그때만 해도 장비나 시설, 정보 등이 턱없이 부족한 시기였기에 이 팟캐스트의 초기 방송을 들으면 음질이 그리 좋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 방송이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역시 콘텐츠에 있을 것이다.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의 콘텐츠는 책을 선정한 이유와 간단한 코멘트를 제외하면 30여분의 방송이 오롯이 낭독으로 이루어져 있다. 김 작가는 “책을 직접 읽는 것만큼 정확히 책을 소개하는 방식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낭독 대상은 국내외의 소설 작품이 주를 이룬다.
김 작가가 혼자 제작, 녹음, 편집, 업로드까지 하는 1인 방송이기 때문에, 낭독 역시 김 작가가 직접 한다. 그가 낭독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낭독의 퀄리티가 일반인보다 훨씬 뛰어난 편은 아니다. 하지만 청취자들은 김영하 작가의 다소 투박한 낭독이 오히려 책의 내용에 집중하게 해준다는 소감을 밝히기도 하고, 작품 중 대사 부분을 읽을 때 살짝 들어가는 김영하 작가의 ‘연기력’을 이 팟캐스트의 백미로 꼽기도 한다.
이 팟캐스트는 업로드 주기가 정해져 있지 않다. 초기보다 업로드 횟수도 많이 줄었다. 이는 김영하 작가가 방송으로 만들고 싶은 책을 발견했을 때 녹음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이 방송을 위해 구태여 책을 찾거나 선정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어떤 이들은 이런 점에서 불성실함을 거론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기존의 공중파 방송과 달리 제작에서부터 전달까지 제작자의 의도대로 제한 없이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을 팟캐스트의 특징이라고 본다면, 팟캐스트라는 매체의 특징을 가장 잘 활용하고 있는 방송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주기에 얽매이지 않는 방송이다 보니 청취자들이 업로드되는 방송과 선정된 책에 더욱 깊은 신뢰를 갖게 된다는 점도 특징 중 하나일 것이다.
마지막 업로드는 4월24일 59회 방송,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편이었다. 5년이 넘은 방송임에도 아직 100회도 안 됐다는 점이 다소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만들고 싶을 때에만 만드는 제작자’와 ‘듣고 싶을 때에만 듣는 청취자’의 특별한 관계가 주는 팟캐스트만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최동민 <빨간 책방> 피디
팟캐스트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의 대표 이미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