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지은의 TV와 연애하기
드라마 제작발표회가 열리면 현장이 곡간으로 변한다. 쌀 수십 포대가 줄지어 쌓인다. 팬클럽에서 마련한 쌀 화환이다. 5~6년 전에는 상징적으로 몇 포대만 놔뒀는데 이제는 팬클럽간에 보여주기 경쟁이 붙어 쌀집을 차려도 될 정도다. 6월23일 <에스비에스> 서울 목동 사옥에서 열린 <너를 사랑한 시간> 제작발표회 때 하지원 팬클럽이 쌀 1023㎏을 준비했고, 7월7일 <문화방송> 상암동 사옥에서 열린 <밤을 걷는 선비> 제작발표회 때는 이준기와 심창민의 팬클럽이 준비한 쌀만 60톤에 육박했다고 한다. 이 쌀들은 발표회 뒤 단체 등에 기부된다.
몇년 전에는 볼 수 없던 현상이다. 2000년대 후반 이후 지상파의 외주제작 비율이 높아지고 시청률 경쟁이 과열되면서 홍보가 더 중요해졌다. 덩달아 제작발표회 현장도 달라졌다. 10여년 전까지는 방송국 대기실 등에서 조촐하게 여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은 호텔이 기본이다. 주로 커피숍이나 레스토랑 등에서 제작발표회를 열었던 <막돼먹은 영애씨>(티브이엔)도 시즌14는 지난 7일 대형 웨딩홀에서 열었다. 최근 들어 에스비에스와 문화방송은 사옥 홍보 차원에서 사옥에서 제작발표회를 열기도 한다. 한 홍보담당자는 “호텔을 고집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배우가 이미지 차원에서 호텔에서 하기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해외 판권 판매 등에 유리하도록 국내외 투자자 등 관계자에게 보여주려는 목적도 있다”고 말했다. 호텔은 장소 대여비와 식사비용까지 합하면 500만원에서 많게는 1000만원이 넘게 비용이 들어간다.
화려해진 제작발표회는 생중계로 대중에게 공개된다. 한류 열풍이 강하게 불면서 해외 팬들의 관심이 높아지자 몇년 전부터 네이버 등 포털을 통해 생중계를 하기 시작했다. 에스엔에스 등에서 실시간으로 질문을 받기도 한다. 지난해 <괜찮아 사랑이야>(에스비에스)는 국내 드라마 최초로 중국 최대 온라인 플랫폼인 유쿠와 투더우에서 제작발표회를 생중계했다. 생중계와 함께 볼거리도 늘었다. 20일 <애인있어요>(에스비에스) 제작발표회에서는 가수 이은미가 이 드라마의 주제곡 ‘우리 두 사람’을 라이브로 열창했다. 지난 3월 <앵그리맘>(문화방송) 제작발표회에서는 최병길 피디가 재즈 공연을 선보였다. <막돼먹은 영애씨> 제작발표회에서는 시즌14에 새롭게 출연한 조현영과 박두식이 ‘신고식’처럼 춤을 추기도 했다.
화려한 겉모습에 견줘 내실은 약해지고 있다. 제작발표회는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고 출연자와 피디가 포토타임을 갖고, 기자의 질문을 받는 순서로 진행된다. 2시간 남짓 진행되지만, 정작 드라마에 대한 심도 깊은 이야기를 듣기는 힘들다. 사진 촬영이나 생중계를 위한 쇼타임 등에 대부분 시간을 할애한다. 몇년 전만 해도 공동인터뷰 뒤 추가로 심층인터뷰 시간이 마련됐지만 요즘은 그마저도 사라지는 추세다. 한 드라마 피디는 “제작발표회가 다채로워지는건 좋지만, 정작 본질인 드라마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줄어드는건 아쉽다’고 말했다.
제작발표회의 화려함과 드라마의 성공은 비례하지 않는다. 한류스타 현빈이 나오는 <하이드 지킬, 나>(에스비에스)는 고급 호텔에서 진행했지만 시청률은 4%대에 그쳤다.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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