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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가련한 가부장제의 하녀 ‘생존기’

등록 2015-10-08 18:58수정 2015-10-23 14:17

<어머님은 내 며느리>
<어머님은 내 며느리>
황진미의 TV 톡톡
<어머님은 내 며느리>(에스비에스)는 제목만 보면 ‘막장드라마’의 최고봉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물론 뒤죽박죽된 족보가 등장하고, 재벌가와 더 이상 비밀도 아닌 출생담이 등장한다. 그러나 뒤집힌 고부관계는 오히려 가부장제의 본질을 까발리는 뇌관으로 작용한다. 드라마는 가부장제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역전될 수 있는 인위적인 제도이며, 그 본질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이해관계와 긴밀히 연관됨을 잘 보여준다.

경숙(김혜리)은 49살의 나이에 의사 아들을 둔 기세등등한 시어머니였다. 그런데 며느리 현주(심이영)가 임신한 상태에서 아들이 죽고 만다. 그 후로도 둘은 시어머니와 며느리로 함께 살다가 4년 만에 각자 재혼한다. 경숙은 양 회장의 외손자 봉주(이한위)와 재혼하는데, 현주와 재혼한 성태(김정현)가 양 회장의 친자임이 밝혀지면서, 경숙은 현주의 조카며느리가 되어 한집에서 같이 산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가? 요약만 보면 비현실적인 스토리 같지만, 드라마는 모든 관계의 매듭에 경제적인 현실성을 부여하여 시청자들을 납득시킨다.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경숙이 시어머니가 된 것은 돈 때문이다. 경숙은 가난 때문에 어린 나이에 돈 많은 남자에게 시집와 아들 키우는 보람으로 살았다. 아들이 죽은 뒤에도 경숙과 현주가 같이 산 것 역시 돈 때문이다. 경숙은 현주의 생계노동이 필요했고, 현주는 경숙에게 빚이 있었다. 경숙이 53살에 나이를 속이고 장성한 딸까지 데리고 재혼한 것도 돈 때문이다. “재테크 중 최고는 효도해서 물려받는 효테크랑 결혼해서 남자에게 받는 혼테크”라는 대사처럼, 경숙에게 재혼은 생계와 노후를 위한 선택이었다. 경숙과 현주가 역전된 고부관계로 한집에 살게 된 것도 돈 때문이다. 양 회장의 명령은 가부장의 명령이자 자본의 명령이다.

드라마는 고부관계를 교란함으로써 가부장적 질서가 얼마나 임의적이고 억지스러운 관계인지 보여준다. 봉주는 한참 어린 성태에게 삼촌이라 부르며 상속이 위태로워지자 양자로 입적해 아들이 되겠다고 말한다. 현주의 어린 아들은 할머니라 부르던 경숙을 이제 형수님이라 부른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관계를 양 회장만 빼고 모두 알게 되었지만 모른 척한다. 자본과 권력을 쥔 양 회장만이 진실을 모른 채 그럴듯한 가부장제의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

경숙은 악역인 것 같지만 실질적인 주인공이다. 그는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한 여성의 삶과 욕망이 어떤 것인지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경숙은 여성성과 모성성을 번갈아 사용하며 살아간다. 어린 나이를 활용해 결혼한 뒤, ‘아들의 어머니’로 살았다. 그에게 모성은 권력이자 자아실현이었다. 아들이 죽자 뒤늦게 다시 미모를 활용해 재혼한다. 나이와 죽은 아들의 존재를 말소하고, 연하 남자에게 ‘오빠’라고 부르며 재혼하여 아이를 낳으려 애쓴다. 뒤집힌 고부관계도 참아가며 조신한 며느리 행세를 하던 경숙은 나이를 속인 게 들통 나자, 이혼 위기에 몰린다. 갑자기 나타난 아기에 의해 ‘남편의 혼외자를 키우는 아내’라는 전통적인 가부장제 모성의 고난도 역할을 부여받은 경숙은 아내의 신분을 회복한다.

경숙은 어리고 예쁜 여성으로 돈 많은 남자의 아내가 되거나, 성공한 아들의 엄마로 권력을 누리고자 하였지만 둘 다 쉽지 않았다. 때로 두 욕망은 충돌하고, ‘팔자’라는 변수에 의해 좌절된다. 결국 경숙이 놓인 자리는 어여쁘지만 가련한 가부장제의 하녀이다. 이혼의 위기에서 “아내가 아닌 하녀로라도 살겠다”고 매달리던 경숙의 말은 진실을 내포한다. 생계를 위해 굴욕을 참아가며 남편의 혼외자를 키우는 아내와 하녀의 거리는 얼마나 멀까. <어머니는 내 며느리>가 폭로하는 가부장제의 진실이 실로 무섭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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