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재근.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화면 너머 공간
‘복면가왕’ 가면제작 황재근의 작업실
‘복면가왕’ 가면제작 황재근의 작업실
“오홍홍홍홍. 안 돼요 안 돼. 너무 지저분해요. 오홍홍홍.” 거절을 잘 못한다는 그가 왜 그렇게 완곡하게 손사래를 쳤는지 알 것 같았다. 10평도 채 안 되는 좁은 공간에 작업대며 재료며 온갖 물건들이 밀도있게 모여 있다. 발 디딜 틈만 있다. “치우려면 1박2일은 걸려요”라며 “오홍홍홍홍” 웃던 게 웃자고 한 소리는 아니었던 거다.
지난 연말 찾은 디자이너 황재근의 서울 황학동 작업실은 동네처럼, 그처럼 사람 냄새가 났다. 그의 말대로 작업이 매일 이어지는 터라 치울 겨를도 없어 지저분은 했지만, 그게 오히려 소박하고 솔직했다. 흔히 생각하는 패션 디자이너들의 화려한 공간과는 거리가 멀었다. 동네 수선집에 온 듯 친근했다. 그러나 평범하지만 비범한 곳이기도 하다. 화제를 모으는 <문화방송>(MBC) 예능프로그램 <일밤-복면가왕>의 복면이 바로 이곳에서 탄생했다.
황학동 10평 수선집 분위기
녹화 1회분에 시안 15개 만들어
가수 두상 맞춰 고치기 반복
집보다 더 머무는 ‘제2의 집’
“치우려면 1박2일은 걸려…
어떤 복면 만드는지는 비밀”
■ 비밀의 공간 그는 7회부터 복면을 만들었다. “저처럼 아방가르드한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가면 제작이 신나요.” 자신의 패션 브랜드 ‘제쿤’ 작업보다 복면에 들이는 시간이 더 많다. “녹화 다음날인 수요일에 시안 회의를 하고 제작진한테 보내면 몇개를 선정해요. 누가 쓸지 모르니까 남자 것 여자 것, 중성적인 것으로 분류하고 색상, 소재 등에 차별을 둬서 제작하죠.” 사용자가 정해지면 그에 맞춰 고치고, 녹화장에 직접 가서 리허설을 보며 수정을 반복한다. “한번 촬영하는 데 필요한 가면은 8개이지만, 시안은 15개를 보내요. 1회 녹화를 2회에 나눠 내보내니까 한달에 30개를 생각해야 해요. 선택되지 않은 절반 이상은 대부분 사용할 수가 없어요.” 가수의 두상, 얼굴 윤곽 등을 따지고, 복면을 써도 노래를 잘 부를 수 있어야 하는 등 인체공학적인 부분까지 고려한다. “가면은 재미있고 멋있지만, 콘셉트가 분명해야 해 처음에는 대중성과 독특함을 조절하는 게 힘들었다”고 한다.
복면이 탄생하면서 그의 평범했던 작업실은 비밀의 공간이 됐다. “어떤 복면을 제작하는지 알려지면 안 돼요.” 사진 촬영도 이미 공개된 복면만 가능했다. 제작 비용이나 사연 등 복면 관련 이야기는 모두 비밀이었다. “시청자들이 작업실에 찾아오고, 복면 좀 보여달라고도 하고 팔라고도 하는데 엠비시에 저작권이 있어서 제가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지금껏 약 100개의 복면이 태어났다. 혼자서 하나에 1주일은 걸리던 제작이 팀원 두명과 함께 서너시간만에도 만드는 등 손은 빨라졌지만, 가수 김연우가 썼던 ‘화생방 클레오파트라’ 등 초창기 힘들게 만들었던 복면들에 더 애착이 간다고 한다.
■ 황재근의 얼굴 복면이 탄생하는 공간은 황재근에 대한 팬들의 호감을 꽃피운 공간이기도 하다. 황재근은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출연하면서 유명세를 탔다. “<마리텔>에서 <복면가왕>패러디를 한다고 ‘클레오파트라’ 짝퉁 가면을 만들어달라기에, 농담처럼 ‘내가 직접 가져가서 씌워주는 역할로 출연하겠다’고 했는데, 이후 진짜로 연락이 왔어요.” 민머리에 독특한 안경을 쓰고, 수염을 돌돌 말아 올리고, 하이톤의 목소리에 웃음소리까지 모처럼 등장한 개성 강한 ‘캐릭터’에 시청자들은 집중했다.
그러나 자칫 비호감이 될 수도 있었던 그를 호감으로 바꾼 건 <나 혼자 산다>에서 작업실이 공개되면서다. 화려한 집에 먼지 하나 없는 청담동 작업실에서 우아하게 복면을 만들 것 같던 그가 작은 오피스텔에 살고, 그보다 더 작은 작업실에서 일하는 모습은 시청자들의 뒤통수를 쳤다. “다들 내가 금수저일 거라고 생각한 게 신기했어요. 나는 디자이너 사이에서도 흙수저였어요. 이런 일상이 공개되는 게 부끄러웠는데 좋아해주셔서 놀랐어요.” 사람들의 ‘착각’엔 그가 한국인 최초로 세계 3대 패션스쿨 중 하나인 벨기에 앤트워프(안트베르펜) 왕립 예술학교를 졸업한 영향이 컸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를 모았다”고 한다. “20살 이후 7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쉰 적이 없어요.”
그도 처음에는 화려한 삶을 따랐다. 신인 디자이너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으로 그냥 지내게 된 작업실을 거쳐 사비를 들여 처음 마련한 작업실은 청담동의 ‘꿈의 작업실’이었다. “그러나 제가 쇼룸으로 보여줄 만큼 제품을 많이 생산하는 것도 아니고, 바이어를 만나는 것도 아니고. 그런 작업실은 저한텐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보여주기 위한 게 중요하지 않다는 걸 느꼈어요. 지금 작업실이 마음이 편해요.” 화려한 디자인의 세계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적나라한 일상 공개가 신경쓰이지는 않을까. “부끄럽지 않아요. 왜 그런 화려한 면만 보여줘야 하는지 모르겠고, 그런 면만 보여주는 게 어울리는 디자이너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살려면 가랭이가 찢어져요. 오홍홍홍홍.”
■ 새로운 꿈이 샘솟는 공간 종편의 인테리어 프로그램을 맡는 등 방송 출연을 계기로 정신없이 바빠졌다. 강의 요청도 쏟아진다. 작업실은 그런 그가 온전히 디자이너 황재근으로 돌아올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도 하다. “제2의 집이라고 할까? 깨어 있는 시간에 가장 오래 있는 곳이에요. 책상에 앉아 세금도 내고, 영수증 정산도 하고 잡다한 일이 끝나면 직원들 다 퇴근한 새벽이나 주말에 혼자 나와 디자인을 해요.” 화가를 꿈꿨고 도예과를 나와, 패션 디자이너가 되려고 유학을 간 이후부터 줄곧 한길을 걸었던 그가 새로운 꿈을 꾸는 공간이기도 하다. “방송을 하면서 꿈이 발전했어요. 디자인을 하고, 그 디자인으로 다양한 콜라보를 하고 싶어요.” 또 하나의 꿈이 이 소박한 작업실에서 새록새록 샘솟고 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황재근의 물건
■ 녹색으로 염색한 꿩털 2013년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 올스타>에서 우승했을 당시 과제로 사용했던 소품이에요. 제작하고 남은 소품은 제작진이 수거해가는데, 출연자들을 태우고 다니던 버스 기사 아저씨가 제작진이 버린 꿩털을 챙겨 버스에 붙여뒀어요. 깃털을 차에 붙여두면 사고가 안 난다는 미신 같은 게 있었나 봐요. 그런데 마지막 경쟁을 앞두고 저한테 선물해주셨어요. 일등 했으면 좋겠다고. 진짜 우승했어요. 추억도 깃들어 있고 그때 생각도 나서 간직해요. 가끔 직원들이 이 깃털을 복면 재료로 사용하자고 얘기해서 ‘야!’라고 소리질러요.
■ 만년청 개운죽 작업실을 네번 옮겼어요. 처음에는 신인 디자이너한테 제공하는 프로그램으로 무료로 사용했고, 이후 사비를 들여 청담동에 얻었고, 아는 사람을 통해 신설동에서 무료로 있다가, 지금의 황학동으로 이동했어요.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자신의 작업실을 꿈꾸잖아요. 그때 받은 여러 선물 중에 개운죽이 있었어요. 이후 작업실을 옮길 때마다 다 부서지거나 사라졌는데, 개운죽만 지금까지 살아 있어요. 처음 시작을 함께 했던 의미가 남달라 지금도 갖고 다녀요.
■ 뾰족한 안경 일할 때만 이 안경을 써요. 평소에 쓰는 안경은 따로 있어요. 강해 보이고 싶기도 하고 독특해 보이고 싶기도 해서 골랐어요. 이 안경을 쓰면 평범한 황재근이 아닌 디자이너 모드가 되는 거죠.
남지은 기자
녹화 1회분에 시안 15개 만들어
가수 두상 맞춰 고치기 반복
집보다 더 머무는 ‘제2의 집’
“치우려면 1박2일은 걸려…
어떤 복면 만드는지는 비밀”
<일밤-복면가왕>의 복면을 만드는 작업실. 황재근 디자이너의 의류 브랜드와 복면 재료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남지은 기자
복면 시안들이 한쪽 벽에 붙어 있다. 제작진의 의견을 수렴해 수정작업을 거친다. 남지은 기자
복면은 시중에서 파는 가면틀을 사용해서 만든다. 남지은 기자
지금껏 만든 복면들과 황재근 디자이너가 직접 착용하려고 만든 복면(오른쪽). 남지은 기자
<일밤-복면가왕>의 복면을 만드는 작업실. 황재근 디자이너의 의류 브랜드와 복면 재료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남지은 기자
황재근.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황재근의 물건
꿩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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