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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대사 한줄에 꽂혀 출연했다는 조진웅

등록 2016-02-26 19:05수정 2016-02-27 13:11

조진웅이 탐낼 만한 배역이 티브이엔 드라마 <시그널>을 통해 왔다. 서툰 혈기와 현실 앞에서의 좌절, 강철처럼 단련된 베테랑의 모습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묶은 모습이다. 백종헌 <씨네21> 기자 legend@cine21.com
조진웅이 탐낼 만한 배역이 티브이엔 드라마 <시그널>을 통해 왔다. 서툰 혈기와 현실 앞에서의 좌절, 강철처럼 단련된 베테랑의 모습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묶은 모습이다. 백종헌 <씨네21> 기자 legend@cine21.com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티브이엔 드라마 <시그널>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얼굴에 분칠한 사람들 말 절반은 걸러 들으라.” 대중문화 분야를 다루는 글쟁이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대중문화 종사자들이 다 병적인 거짓말쟁이라는 뜻은 아니다. 사소한 말 한마디도 과잉해석과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환경에 처한 이들이니, 허심탄회하게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일반인들에 비해 많다는 얘기다. 명색이 꿈과 환상을 파는 직종인데, 진솔하고 싶단 이유로 “이번에 같이 작품을 한 아무개는 정말 싫은 사람이었다” 내지는 “돈이 급해서 내키지 않는 작품인데 그냥 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직종부터가 예의상 악의없는 거짓을 말하거나 복잡다단한 속내를 머릿속으로 오래 정리해서 골라낸 모범답안을 말해야 하는 직종인 게다. 그래서 인터뷰마다 토씨 하나 바뀌지 않은 이야기를 거푸 들려주는 연예인을 볼 때면 혼자 생각한다. 저 대답은 얼마나 오랜 고민과 내적 갈등, 정리 끝에 정한 모범답안인 걸까? 때론 인터뷰에서 한 말보다 그 행간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게 더 진실에 가까울 때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조진웅은 참 흥미로운 배우다.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아지는 순간 바로 예상치 못한 반전을 중첩시키는 사람이니까. 어떤 인터뷰에선 전철에서 눈을 마주치는 사람들이 혹시나 남들보다 큰 자신의 덩치를 흉보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할 정도로 소심한 사람임을 강조하다가, 다른 인터뷰에서는 대학시절 혹독한 신체 트레이닝에 지친 나머지 연극영화과 커리큘럼에서 신체 트레이닝은 없어져야 한다는 요지의 대자보를 붙였다는 무모한 일화를 들려주는 남자. 우레와 수컷이라는 강한 뜻의 한자로만 똘똘 뭉친 아버지의 이름을 예명으로 빌려다 쓸 정도로 호방한 이미지를 내세운 사람이, 젊은 시절 타고 다녔던 125㏄짜리 노란색 소형 스쿠터에 ‘나나’라는 이름을 붙여줬다는 턱도 없이 귀여운 일화를 들으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수필을 좋아하는 소심한 문학소년이었다는 이야기에서 아버지가 보여준 서부영화 속 웨스턴 영화의 주인공처럼 선이 굵은 남자들을 동경하며 자랐다는 이야기로 넘어가면 그 아득한 간극에 새삼 놀란다.

과거와 현재가 무선교신한다는
판타지-수사물의 결합 ‘시그널’
조진웅은 대본 보기도 전에 불신

완고한 그를 움직인 것은
“20년 지났으니 거긴 달라졌겠죠?”
라고 묻는 한줄의 대사였다니…
생각해보니 안 바뀌어 있더라는 것

서툰 혈기와 울분-강철같은 베테랑
시간의 단층 너머 두 얼굴의 주인공
조진웅의 캐릭터와 묘하게 겹쳐

물론 어느 것이 진짜냐를 따질 것 없이 그 모든 것이 인간 조진웅의 모습일 것이다. 사람은 모두 크고 작은 모순을 안고 있는 존재여서 소심한 듯하면서도 과격하고 섬세하면서도 선 굵은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니까. 진짜 흥미로운 대목은 조진웅이 그런 인간적인 모순을 딱히 정제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많은 이들이 배우로서의 일정한 이미지나 일관된 방향성을 보여주기 위해 고심해서 대답을 고르는 동안, 조진웅은 질문을 받는 순간의 진심에 충실하다. 그래서 같은 인터뷰 안에서도 “시나리오에 서술된 캐릭터의 주요 동기를 찾아 분석해 그 캐릭터와 최대한 살가워지면 어느 환경에서도 그 캐릭터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주다가도 이내 “역할에 몸이 맞는지 잘 몰라 아직도 헤맨다”는 걱정을 내비치는 진자운동을 한다. 혹자는 이를 좀처럼 꾸밀 줄 모르는 마초의 기질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조진웅의 태도는 그보다는 배우의 본질을 ‘광대’요 ‘굿쟁이’라고 말한 사람의 직업의식에 가깝다. 이 캐릭터도 담아내고 저 캐릭터로도 분해야겠기에 자신의 다양한 기질들이 서로 충돌하는 모순을 수긍하는 태도.

어쩌면 이러한 조진웅의 태도가 티브이엔 금토드라마 <시그널>(2015)의 주인공 이재한을 그리는 데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어준 건지도 모른다. 지금껏 특정 시점을 배경으로 한 인물을 연기해왔던 조진웅은, <시그널>에선 1989년부터 2000년까지 11년에 걸친 인물의 연대기적 변화상을 그려내야 하는 난제를 만났다. 그것도 2015년 시점의 주인공 박해영(이제훈) 경위의 시간이 선형으로 흐르는 동안, 조진웅이 맡은 이재한 형사의 시간은 인물의 맨 마지막 순간에서 시작해 흐른다. 2000년 감정의 동요 없이 사건을 추적하며 무전 상대인 박해영을 설득하는 베테랑 경사 이재한의 모습을 시청자들에게 먼저 보여준 뒤, 그가 가장 서툴고 설익었던 시절인 1989년으로 돌아가 매사에 마음만 앞서는 어설픈 순경 이재한의 모습을 연기해야 했다. 불과 두 에피소드 사이에 인물의 완성점과 시작점을 함께 보여줘야 하는 쉽지만은 않은 과제, 조진웅은 굳건한 신뢰와 믿음으로 뭉친 2000년의 이재한과 어린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1989년의 이재한을 공들여 묘사해냈다. 인물을 어떤 한 가지 모습으로 규정하기보단 다양한 표정을 지닌 복잡한 존재임을 넉넉히 긍정할 줄 아는 삶의 태도가 뒷받침된 연기다.

게다가 박해영의 시간이 2015년이라는 제한된 시점 안에서 천천히 흐르는 동안, 이재한의 시간은 1989년에서 1995년으로, 다시 1997년으로 몇 년씩 훌쩍 뛰어넘어가며 진행된다. 이재한이 어설픈 순경이었던 1989년에서 자기가 체포했던 전과자를 가족처럼 챙기는 정 많은 형사가 된 1995년 사이 무슨 일들을 겪었는지 드라마는 암시할 뿐 애써 설명하지 않는다. 서사에서 누락된 성장과정을 시청자들에게 설득해 그 변화가 갑작스럽거나 당혹스럽지 않도록 만드는 것은 결국 배우의 몫이다. 예전에도 영화 <퍼펙트 게임>(2011)과 <범죄와의 전쟁>(2012), 에스비에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2011)를 동시에 촬영하며 전혀 다른 세 인물을 연기해 보인 적이 있었지만, <시그널>에선 전혀 다른 모습들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 다른 모습들이 한 인물의 변화상이란 점을 납득시켜야 하는 것이다. 무전기를 매개로 과거와 현재가 교신한다는 판타지적 설정을 수사물의 리얼리티와 진지함으로 보완해야 하는 <시그널>의 특성상 캐릭터가 현실감을 잃는 순간 자칫 서사 전체가 우스꽝스러워질 수도 있었다. <시그널>은 조진웅에게 많은 것을 빚졌다.

재미있게도 조진웅은 캐스팅 단계에선 시나리오를 보기도 전에 설정에 대한 불신을 먼저 드러냈다고 한다. 판타지 같은 무리수 설정이 판치던 문화방송 드라마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2010)나 아기자기한 판타지의 정조를 깔고 있는 영화 <장수상회>(2015)에 출연한 적은 있어도, 본격적인 판타지 장르에 출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 말이다. “무전이 과거에서 현재로 온다는” 기본 설정부터 공감할 수 없었다는 조진웅을 움직인 건 한 줄의 대사였다. 사회 고위층의 위세 탓에 사건의 진실이 은폐되고 무고한 사람이 누명을 뒤집어쓰는 광경을 지켜만 봐야 하는 무기력에 시달리는 1995년의 이재한이 2015년의 박해영에게 “20년이나 지났으니 거기는 지금과는 달라졌겠죠?”라고 묻는 한 줄의 대사. 제작발표회에서 조진웅은 “생각해보니 안 바뀌어 있더라”는 말로 <시그널>에 참여한 이유를 밝혔다. 세상의 정의를 바로 세우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재한의 ‘주요 동기’가, 배우 본인조차 공감할 수 없었던 극의 설정을 시청자들에게 설득해내도록 만들었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조진웅은 과거 <범죄와의 전쟁> 개봉 당시 한 인터뷰에서 탐나는 캐릭터가 있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최민식이 연기한 ‘익현’을 꼽으며 그 이유를 “스펙트럼이 큰 인물이라서”라 설명한 적 있다. 부패한 세관원에서 반쪽짜리 건달, 다시 권력자에게 빌붙어 동료를 배반하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인물의 변화상을 병풍처럼 펼쳐 한국의 어두운 근현대사를 그려낸 익현이란 캐릭터는 확실히 그 어떤 배우라도 탐을 낼 만한 배역이었다. 그리고 지금, 조진웅에게 바로 그런 배역이 도착했다. 서툰 혈기와 울분, 현실의 벽 앞에서 번번이 마주하는 좌절, 강철처럼 단련되어 흔들리지 않는 베테랑의 모습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정의에 대한 갈망이란 키워드 하나로 엮어내 믿고 싶은 판타지를 완성시키는 배역이.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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