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모병제 제안이 여당 쪽 대선 주자의 입에서 나왔다. 이런 주장이 나온 가장 큰 이유는 징병제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의식해서일 테지만, 여기에는 단순한 대중 영합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통치체제의 변화와 그에 따른 통치집단의 새로운 전략 모색이라는 측면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순전히 군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과 같은 규모의 군대를 유지하는 것에 큰 의미는 없다. 그런데도 비효율적인 징병제가 유지되어온 데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는데, 이제 그 근거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군대 갔다 와야 사람 된다’는 말이 있다. 사실 이 말만큼 징병제의 의미를 잘 표현한 말은 없다. 징병제는 전쟁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인간’을 만들어내는 기능을 맡고 있다. 미셸 푸코가 잘 분석했듯이 명령을 순순히 따르면서도 ‘쓸모 있는’ 인간집단을 만들어내는 군대의 기능은 산업자본주의가 ‘성장’하는 데 큰 구실을 했으며, 이는 한국 자본주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적지 않은 사회혁명이 군대 반란에 의해 촉발되었듯이 군인들은 항상 순종적이지는 않았으며, ‘산업전사’들 역시 노동운동의 주체로 변모하곤 했다. 이는 절대다수를 구성하는 국민들이나 노동자들의 주체성에 의지해야만 하는 국민국가와 산업자본주의의 태생적 딜레마였으며, 복지국가 체제는 그러한 역학관계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금융화는 이런 역학관계를 역전시켰다. 노동자들이 많은 상품을 생산해줘야만 자본축적이 가능했던 산업자본주의와 달리, 금융이 중심이 된 체제에서는 생산성 향상을 통하지 않는 자본축적이 얼마든지 가능해졌다. 그 결과 산업전사와 같은 부담스러운 존재를 굳이 육성할 필요도, 복지와 같은 식으로 노동자들에게 양보할 필요도 없어졌다. 자본축적의 핵심이 공장에서 벗어나면서 이제 ‘군대 갔다 와야’ 만들어지는 그런 인간에 대한 수요 자체가 줄어들게 된 것이다. 이렇게 봤을 때, 모병제 논의의 등장은 신자유주의적 사회 재편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미국의 모병제가 ‘경제적 징병제’라고 불리기도 하듯이 미군의 재생산은 빈곤층의 재생산으로 지탱되고 있는데, 극심한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국민의 평등을 전제로 한 징병제를 없애자는 주장이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제는 지키는 이들과 지켜지는 이들이 형식적으로도 분리되는 것이며, 이는 미국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실질적으로는 용병제를 도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마키아벨리는 용병을 활용하는 것이 공화국을 멸망으로 이끈다고 보았는데, 지금 모병제가 논의되는 상황도 국민국가의 종언을 알리는 징조로 보인다. 그럼 징병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일까? 여기서 경계해야 하는 것은 징병제냐 모병제냐는 식으로 군의 모집 형태에만 논의의 초점이 맞춰지는 일이다. 군대 문제의 핵심은 군대 내부의 비민주성과 폭력성에 있는 것이지, 모집 형태에 있지 않다. 최근에는 군대라는 조직이 지닌 문제들이 많이 공론화되기도 했지만, 모병제 도입은 그러한 논의를 차단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징병제 폐지가 군대 문제를 ‘소수’의 문제로 만듦으로써 군대 민주화를 오히려 어렵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의 바탕을 이룬 것은 무장한 인민의 힘이었으며,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 국민개병이라는 이념이 등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누가 무장하느냐는 문제는 누가 주권을 갖느냐는 문제였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무장은 의무라기보다 권리였다. 군대와 민주주의는 아예 상반되는 것으로 생각되기 쉽지만, 민주주의와 폭력의 관계를 어떻게 푸느냐가 국민국가 이후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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