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 250’에서 바벨어 ‘코감시’를 사용하는 장면.
“카 라 완타, 키 플룸, 모이 바펠 완타, 하이 키 팩.”
“카 라 완타, 다우~ 바이보~ 플룸~.”
“하타 품 합!”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내가 리더가 되면, 우리 낮잠 자고 아침밥은 내가 할게. 밤에는 마스크팩 하자.” “내가 리더가 되면, 다같이 그림 그리고~놀고~낮잠 잘거야.” “오늘 일하지 말자!” 이렇게 깊은 뜻이.
‘바벨 250’ 출연진들. 왼쪽부터 타논, 안젤리나, 마테우스, 이기우, 미셸, 니콜라, 천린.
세계 공용어 ‘바벨어’ 만들기에 도전한 <바벨 250>(티브이엔·연출 이원형)이 27일 종방을 앞두고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경남 남해 다랭이마을에서 진행된 14일간의 합숙촬영을 통해 총 175개의 바벨어가 탄생했다. 배우 이기우(35·한국), 삼바댄서 마테우스(29·브라질), 투자가 타논(38·타이), 콘서트 디렉터 천린(27·중국), 2013 미스 베네수엘라 2위 미셸(22·베네수엘라), 배우 니콜라(34·프랑스), 대학생 안젤리나(20·러시아) 등 출연진들의 ‘바벨어 회화’도 초급을 벗어나고 있다. 8화(8월29일 방영)에서는 완타(WANTA, 바벨어로 리더)를 폭(POK, 바벨어로 투표)하기 전에 각자 공약을 문장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촬영 첫날 ‘영어 금지, 모국어 사용’ 규칙 때문에 “대땀이싱건”(포르투갈어로 ‘분명히 지금 내 욕 하는 것 같은데’라는 뜻) “땀이 흥건하다고?” “무이투”(포르투갈어로 ‘많다’) “그래, 여름엔 모히토지” 같은 동문서답만 주고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해외 진출 ‘청신호’도 켜졌다. 7일 서울 상암동 씨제이이앤엠 사옥에서 만난 이원형 피디는 “브라질, 중국에서 벌써 방송 포맷을 사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고 밝혔다. 최근 시청률은 0.4%(닐슨코리아 제공)에 그쳤지만, 불통의 늪에 빠진 7명을 통해 역설적으로 ‘진정한 소통’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미덕을 가졌다.
‘바벨 250’에 출연중인 프랑스 배우 니콜라가 파업을 뜻하는 바벨어 문장을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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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어 어떻게 만들었을까 바벨어의 탄생지 ‘바벨 하우스’에서는 매일 투표로 리더를 뽑는다. 우선 제작진은 리더에게 하루 1개의 바벨어를 만들도록 했다. 여기에 타논이 “이런 속도로 언제 만드나. 7명이 모두 하루에 1개씩 만들자”고 제안해 그 뒤부터는 빠른 속도로 바벨어가 늘어났다. 말문이 막힐 때 즉석에서 합의를 통해 만들기도 한다.
아직은 많이 낯선 바벨어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일단 모국어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이기우가 만든 말을 뜻하는 바벨어는 수다(SUDA)다. 프랑스에서 온 니콜라는 좋다, 맛있다는 뜻으로 ‘본’(BON)을 제안했다. 의성어도 많다. 닭은 꼬꼬(KOKO), 피곤해는 음야(UMYA)다. 하타(HATA, 오늘), 마타(MATA, 내일), 파타(PATA, 어제)처럼 묶음도 생겨났다. 정체를 도저히 알 수 없는 말도 있다. 한국어로 묵찌빠, 중국어로 쓰토우젠타오뿌, 바벨어로는? 드라 쁘라 미~.
바벨어가 있어도 여전히 소통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기우와 건강상 하차한 타논을 대신해 투입된 태국인 업이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해 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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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인 말부터…최고 인기어는 ‘고마워’ 지금까지 방송에 등장한 바벨어는 50여개 정도. 주목할 점은 긍정적인 의미를 담은 말부터 만들어졌다는 거다. 타(TA, 그래)를 시작으로 미안(MYAN, 미안), 카몬(KAMON, 가자), 할로(HALO, 안녕), 지아(JIA, 집으로 돌아가다) 등이 바벨어 사전 첫장에 올랐다. 초반에 만든 10개 중 부정의 의미를 담은 것은 네번째 품(PUM, 아니) 하나뿐이다. 타논은 동료들에게 위험한 상황을 경고하려 포(PO, 조심해)를 만들기도 했다.
열번째로 만든 코감시(KOGAMSI, 고마워)는 타이어 ‘코쿤캅’과 한국어 ‘감사합니다’, 프랑스어 ‘메르시’를 합쳐 탄생했다. “촬영장에서 가장 많이 들렸던 단어”(이 피디)다. 마테우스가 만든 스무번째 슈슈(XUXU, 아름답다)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여성 출연자를 향한 흑심이 묻어나긴 해도, 상대방을 기분좋게 하는 말임은 분명하다. 영어 단어를 뒤집어 만든 케이오케? 케이오!(KEIOKE? KEIO!, 너 괜찮아? 난 괜찮아!)도 상대방을 배려하는 한마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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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을 전하는 데 많은 말이 필요한 건 아냐 8화에서 ‘용문사’로 일하러 간 마테우스가 주지스님께 “권뚜선스 보쎄뗑?”(나이가 어떻게 되세요?)이라고 묻자 스님은 “니 권투선수라고?” 되묻는다. 이런 엇나감의 재미에만 집착했다면 그저 그런 예능으로 남았을지 모른다. <바벨 250>를 보면 눈빛·행동도 언어가 되고 진심을 전하는 데 많은 말이 필요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마테우스는 톱질하는 스님에게 포르투갈어로나마 “다치시겠다”고 걱정의 말을 잊지 않는다. 스님이 “사회에 나가 열심히 살라”며 덕담을 건네자 진심을 알아챈 마테우스는 “오브리가두”(감사합니다)라고 답한다. 이쯤 되면 “어? 알아듣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릴 만도 하다.
남해 용문사 주지스님이 마테우스에게 덕담을 건네고 있다.
유독 중국어를 낯설어하는 분위기 때문에 초반 혼자 있던 시간이 많았던 천린을 챙기던 니콜라의 모습도 빼놓을 수 없다. 니콜라는 랭귀지박스(하루 1번 10분간 동시통역을 이용할 수 있는 자리)에서 천린에게 이 프랑스어 문장을 꼭 기억하라고 말한다. “브즈앙 드 느 빠 에뜨흐.”(혼자 있지 않아도 돼) 잠시 뒤 통역된 말을 들은 천린은 결국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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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뒷이야기 한 언어당 2명씩 총 12명의 동시통역사는 <바벨 250>의 숨은 주역이다. 2교대 24시간 내내 이어폰, 마이크를 달고 실시간으로 출연진 대화를 제작진에게 전달했다. 이를 작가들이 제작진 단체대화방에 일일히 쳐서 올리면 이 피디가 촬영장 상황을 파악하는 식이었다. 리더한테는 매일 한 명만 통역 장착 무전기로 소통할 수 있게 했는데 생각만큼 잘 쓰지 않았단다. 이 피디는 “그냥 손짓 발짓을 하고 말더라. 늑대소년이 문명사회에 와서 어색해 하는 것처럼 보였다”며 웃었다.
한편, 티브이엔쪽은 13일 타논과 미셸의 정식 교제를 공개했다.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들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자 한 <바벨 250>이 또 하나의 성과를 낸 셈이다.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 사진 프로그램 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