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예 성인방송으로 커밍아웃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2007년 10월9일 개국 1돌을 맞은 <티브이엔>(tvN)은 방송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국회의원들의 질타를 받았다. 여자들이 비키니를 입고 선정적인 행위를 하는 프로그램 <티브이엔젤스> 등 1년 동안 받은 제재만 16건으로, “방송위원회를 무시하는 처사”라는 말까지 들었다. 정확히 개국 10년을 맞은 2016년 10월9일의 풍경은 어떨까? 10년을 기념하는 시상식 ‘티브이엔 어워즈’를 열고 환호와 박수가 쏟아진다.
선정성과 자극성의 대표 채널이던 티브이엔이 개국 10년 만에 대한민국 방송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채널 시청률도 2006년 0.04%에서 2016년 1.13%(닐슨코리아 제공)로 성장했다. 지상파 3사가 4%대에서 3%대로 떨어진 것과 상반된다. 1~2%만 나와도 성공했다던 시청률이 <응답하라 1994> <시그널> 등이 회별 10%를 기록하며 지상파와 맞먹는 수치로 올라섰다. 금토 드라마를 신설하는 등 티브이 편성 법칙을 바꿨고, ‘응답’ 시리즈로 복고 열풍을 불러오고, <미생>으로 을들의 아픔을 대중문화 전반의 화두로 만드는 등 이슈를 선점했다. 광고 수익도 개국에 견줘 7배나 뛰었다. 지상파 피디들이 앞다투어 이적하고, 김혜수, 전도연 등 톱스타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티브이엔은 어떻게 견고하던 지상파 카르텔을 무너뜨렸을까?
■ 망해도 좋다…실패에 투자하다 티브이엔의 성공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평가가 “지상파에서 볼 수 없는 참신한 기획”이다. 개국 초기 페이크 다큐 드라마 2006년 <막돼먹은 영애씨>를 시작으로, 삼시세끼 밥만 해먹는 전대미문의 예능 <삼시세끼>(2014년) 등이 쏟아졌다. 2011년 <한국방송>에서 이적한 이명한 본부장은 “망해도 좋다”는 내부 분위기가 결정적이라고 했다. “5년 전 티브이엔에 왔을 때 가장 놀랐던 것이 실험적인 시도라면 도전했다는 것만으로도 내부에서 박수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차별적인 시도는 실패를 인정해주는 문화가 없으면 이뤄지지 않는다.” 그는 “삐딱하게 바라보는 것에 관대했고, 그 삐딱함을 인정한 게 10년 성장의 동력”이라고 했다. 지상파에서는 몇번 실패하면 다음 프로그램을 맡기가 힘겨워진다. 지상파의 한 예능 피디는 “망하면 안 된다는 분위기는 피디들한테 틀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자체 검열을 하게 한다”며 “시청률 잘 나오는 형식을 답습하는 것이 지상파가 올드해지는 이유”라고 말했다. 물론 한번 내보내면 6개월 정도는 방송했던 지상파와 달리, 케이블은 짧은 시즌제라 실패에 따른 출혈이 크지 않았다는 점 또한 티브이엔의 도전을 뒷받침한 요인으로 꼽힌다.
과감한 투자도 한몫했다. 이덕재 씨제이 방송미디어 부문 대표는 “경영진의 확고한 투자 의지가 있기에 가능했다”며 “문화와 인적 부문에서 글로벌 경쟁을 해야 한다는 생각 아래 지난 10년간 콘텐츠 제작에만 1조원 넘는 돈을 투자했다”고 말했다. 개국 초기 500억원 단위로 출발해 2012년 1000억원을 넘어섰고, 올해 1500억원, 내년엔 2000억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1~2년 단기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시작부터 적자를 ‘중기 계획’에 반영했다. 실제 2007년에만 98억원의 영업손실을 낸 티브이엔은 개국 7년 만인 2013년 들어서야 흑자로 접어들었다. 티브이엔을 포함한 미디어콘텐츠 부문(방송 부문) 영업이익은 2013년 20억원, 2014년 22억원에서 2015년 462억원으로 2000% 증가했다. 이덕재 대표는 “10년간 투자 비용이 조직 문화를 정착시켰고, 이제 그 문화가 앞으로 돈을 벌어들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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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부 평균 40대…주니어들도 결정 참여 콘텐츠를 선정하고 지원하는 방식도 눈여겨볼 만하다. 2006년 동성애자를 내세운 첫 자체 제작 드라마 <하이에나>, 브라운관의 변방으로 내몰렸던 ‘할배’들을 예능의 중심에 세운 <꽃보다 할배> 등은 지상파였다면 통과되지 않았을 기획안이다. 다각도로 참신한 시도가 가능했던 것을 내부에서는 집단지성의 힘이라고 자평한다. 이명한 본부장은 “피디가 만들고 싶은 프로그램을 프레젠테이션하는 방식은 어디나 비슷하다. 다만 이 결정 회의에 간부들뿐 아니라, 2~3년차인 20대 주니어들이 참여한다”고 했다. 간부들의 평균 연령대는 40대로 지상파보다 젊은데도,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는 그들이 더 잘 안다는 걸 인정한다는 뜻이다. 한 지상파 피디는 “50~60대의 간부들이 모여 요즘 예능 트렌드를 결정하는 지상파와 구분짓는 결정적인 차이일 것”이라고 했다.
국 간 장벽이 없는 것도 성공 요인으로 꼽힌다. <응답하라 1997>을 만든 신원호 피디는 예능 피디다. <혼술남녀> <싸우자 귀신아>의 최규식, 박준화 피디도 예능국 출신이다. 이 피디는 “지금은 한국방송이 <프로듀사>를 만드는 등 지상파도 변화하고 있지만, 예능 피디가 드라마를 만드는 건 티브이엔 이전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했다. 2011년 이후 지상파 피디들이 대거 이적했을 때도,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다.
■ 업무엔 자율적…마케팅은 협업 티브이엔으로 이적한 지상파 출신의 한 예능 피디는 “피디는 콘텐츠만 잘 만들면 되는 분위기가 좋았다”고 했다. 티브이엔은 부서를 세분화해 각자의 영역에 충실히 하는 시스템이다. 프로그램 제작을 결정하면, 기획 단계부터 마케팅팀, 글로벌팀 등이 붙어 모든 기획회의에 참여한다. “이 콘텐츠에 가장 적절한 마케팅 방식과 홍보 방법, 글로벌 시장 판매 등을 시작부터 파악하는 것”이다. 피디가 협찬도 따와야 하고, 홍보 방식 등 다양한 고민을 떠안아야 했던 지상파 시절에 견주면, 오롯이 콘텐츠에 집중할 수 있고, 그래서 더 좋은 결과물을 낼 수 있다고 본다. 이명한 본부장은 “기획이 좋으면 좋은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는 최상의 지원을 해준다. 피디 한명에 주니어 피디 7~8명 정도를 붙여준다”고 했다. 현재 티브이엔의 피디는 전체 100명 정도인데, 지상파와 달리 쉬는 사람 없이 모두 일을 한다.
팀은 각자의 영역에서 집중하면 된다. 편성의 법칙을 뒤흔든 과감한 시도가 나온 것도 ‘내가 할 일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전략팀의 장고 끝에 지상파가 집중하지 않는 시간대에 과감하게 투자했다. 2013년 <응답하라 1994>를 이전까지 드라마가 없던 금토 시간대에 편성한 이후 <시그널> <또 오해영> 등 웰메이드 드라마를 잇따라 성공시켰다. 방송사로는 이례적으로 마케팅의 중요성을 알고 투자한 점 또한 성공 요인의 하나로 꼽힌다. 홍보담당자에 홍보를 맡기던 5년여전 부터 이미 마케팅팀을 따로 만들고, 에스엔에스, 오프라인 이벤트 등을 활발하게 해왔다. 이덕재 대표는 “수많은 플랫폼으로 수많은 동영상 콘텐츠가 쏟아진다. 좋은 콘텐츠가 대중에 도달하려면 마케팅도 중요하다”며 “다른 미디어 회사보다 콘텐츠 마케팅에 지속적으로 인적 투자를 해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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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화까지 과제도 첩첩 티브이엔은 이제 글로벌 미디어 그룹을 꿈꾼다. 계열 드라마 제작사인 스튜디오 드래곤을 출범시켜 아시아 시장은 물론 향후 유럽과 북미까지 진출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든다는 계획이다. 글로벌화를 위해 넘어서야 할 과제들도 있다. <굿와이프> <에스엔엘 코리아> 등 성공한 해외 포맷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미생> <시그널> 등 자체 생산 콘텐츠의 질과 양을 한층 키우는 게 일차 과제다. 성형 논란을 부추기는 <렛미인>이나 사교육 업체를 노골적으로 홍보해준 <성적욕망> <공부의 비법> 등 불쑥불쑥 튀어나온 선정성의 유혹도 조심해야 한다. 이덕재 대표는 “개국 당시에는 시청자 확보를 위해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콘텐츠를 선보였지만, 2008년부터 시청률이 높더라도 여론이 좋지 않으면 과감히 폐지하는 등 자정의 노력을 계속했다”고 다짐을 밝혔다.
모기업인 씨제이 계열사를 노골적으로 홍보하는 등의 모양새 또한 걸림돌로 지적된다. 2012년 <막돼먹은 영애씨>에서는 캐릭터의 입을 빌려 “씨제이 홈쇼핑이 마트보다 물건값이 싸고 씨제이에서 파는 훈제요리가 가장 맛있다”며 채널 번호, 주문 방법까지 나열해 징계를 받기도 했다. <에스엔엘 코리아>의 정치풍자 꼭지 ‘여의도 텔레토비’를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징계 뒤 아예 폐지하고 과도한 정부정책 홍보 영상을 내보내는 등 정권 눈치보기에 골몰하는 듯한 양상 또한 콘텐츠 기업으로서 우뚝 서기 위해 반드시 바꿔야 할 부분으로 지적된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티브이엔 10년 4단계 변화상
■ 2006~2007년 인지도 상승 노이즈 마케팅으로 개국 1년 만에 이름을 알렸다. <김구라의 위자료 청구 소송>은 ‘비 오는 날이면 부인이 발정난다’는 식의 선정적 이야기가 소재였고, 지하철 성추행 장면을 실제인 것처럼 조작 방송해 징계까지 당한 <독고영재의 현장르포 스캔들>은 티브이엔에서 처음으로 3% 시청률을 찍었다. <리얼스토리 묘>는 변태 성문화와 비과학적 현상 등 자극적인 소재를 다뤘다. 자극적인 내용으로 2007년 11월에는 규정 조항을 5차례 위반하며 등록 취소 위기까지 놓였다.
■ 2단계 2008~2011년 예능 왕국 인지도 쌓기에 성공한 이후에는 논란이 되는 프로그램을 폐지하고 2008년부터는 대중 친화적인 공감을 쌓는 콘텐츠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티브이 롤러코스터> <화성인 바이러스> 등 지상파와 차별화된 혁신적인 예능 콘텐츠들이 화제를 모으기 시작했고, 2011년 <에스엔엘 코리아>까지 이어오며 예능 강자로 자리매김했다. <삼시세끼> 등 사회 분위기를 담은 힐링 예능도 등장했다.
■ 3단계 2012~2016년 드라마 왕국 티브이엔 채널을 소유한 씨제이이앤엠은 2012년 “870억원을 투입해 앞으로 총 26편의 드라마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2012년 <응답하라 1997>이 성공한 이후부터 드라마 비중을 늘렸다. 2006년 1편이던 드라마가 2016년에는 15편이 됐다.
■ 4단계 2017년 이후 글로벌 아시아 시장은 물론 향후 유럽과 북미까지 진출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 계획으로 계열 제작사인 스튜디오 드래곤을 출범시켰다. <굿와이프> <안투라지> 등 한국에서 처음으로 미국 드라마를 리메이크한 것도 그의 연장선이다. 이덕재 대표는 “글로벌 콘텐츠 회사로 거듭나는 것이 향후 10년의 목표”라고 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