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트 폭력 논란을 부른 에스비에스 드라마 <우리 갑순이> 1회 장면. 프로그램 갈무리
# 어느 레스토랑 안
어색한 표정으로 마주 앉은 두 사람. 얼마 전 헤어진 신갑순과 허갑돌이 다시 만났다. 10년을 사귀었지만 님에서 남이 되는 건 한 순간. 갑순은 “우리 온도 다 식었어. 이제 미지근하지도 않아. 우리 공부 열심히 해서 각자 목표 이루자. 너 꼭 성공해”라며 먼저 자리를 뜬다. 갑돌이 “같이 있으면 안 되니”라고 호소해보지만 차갑게 돌아서는 갑순. 멍하니 앉아있던 갑돌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밖으로 뛰어나간다.
# 레스토랑 밖 길거리
바쁜 걸음으로 걸어가는 갑순. 뒤에서 쫓아온 갑돌이 갑순의 팔을 세게 붙잡는다. “놔! 놔!” 갑순이 소리치는데 갑돌은 아랑곳 않고 으슥한 골목으로 갑순을 끌고 들어간다. “싫어, 싫다고. 놔!” 갑순의 외침에 갑돌은 “너랑 못 헤어져. 사랑한다고 이 바보야”라며 입맞춤을 시도한다. 실랑이 끝에 갑순은 눈물을 흘리며 갑돌의 품에 안기고…. 잠시 뒤, 카메라는 불이 꺼지는 모텔 창문을 비춘다.
‘데이트 폭력’ 미화 논란을 부른 드라마 <우리 갑순이>(에스비에스 토·일 밤 8시45분) 1회 방송분에 대해 ‘문제없음’ 결론을 내린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이하 방심위)에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12일 열린 제35차 방송심의소위원회 정기회의 결과를 보면,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의 의사에 반해 강제적으로 입맞춤하는 해당 장면은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27조(품위 유지) 5호, 제30조(양성평등) 2항에 비추어 봤을 때 제재 대상이 아니”다. 해당 규정은 다음과 같다.
제27조(품위 유지) 방송은 품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시청자의 윤리적 감정이나 정서를 해치는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표현을 하여서는 아니 되며, 프로그램의 특성이나 내용전개 또는 구성상 불가피한 경우에도 그 표현에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
1. 불쾌감을 유발할 수 있는 과도한 고성·고함, 예의에 어긋나는 반말 또는 음주 출연자의 불쾌한 언행 등의 표현
2. 신체 또는 사물 등을 활용하거나 의도적으로 무음·비프음, 모자이크 등의 기법을 사용한 욕설 표현
3. 혐오감·불쾌감을 유발할 수 있는 성기·음모 등 신체의 부적절한 노출 또는 과도한 부각, 생리작용, 음식물의 사용·섭취 또는 동물사체의 과도한 노출 등의 표현
4. 불쾌감이나 성적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성기·성행위 또는 외설적 내용 등에 대한 과도한 표현
5.
그 밖에 불쾌감·혐오감 등을 유발하여 시청자의 윤리적 감정이나 정서를 해치는 표현
제30조(양성평등)
①방송은
양성을 균형있고 평등하게 묘사하여야 하며,
성차별적인 표현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②방송은
특정 성(性)을 부정적, 희화적으로 묘사하거나 왜곡하여서는 아니된다.
③방송은
성별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조장하여서는 아니 된다.
심의 결과가 공개된 뒤 포털 댓글창에는 “이별 폭력으로 흉흉한 세상에 아직도 이런 생각을”(tare****) “시대가 바뀐 걸 방심위 아재들만 모르나”(sree****) “데이트 폭력은 범죄입니다”(widy****) 등의 반응이 잇따라 올라왔다.
이런 비판은 <우리 갑순이> 1회가 나간 8월 말부터 나왔다. “여자가 싫다고, 이거 놓으라고 뿌리치는데 억지로 벽으로 밀어서는 키스하는 건 성추행”(@so****), “남자가 봐도 보기 안 좋았다”(@qw****)는 반응이었다. 한 누리꾼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직접 방심위에 민원을 넣었다며 모니터 화면을 갈무리해 올리기도 했다.
<이기적 섹스>의 저자 은하선씨는 지난 4월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한국 드라마는 청소년에게 유해하다며 섹스에 대해선 쉬쉬하면서, 남자가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고 여자 손목을 휘어잡거나 컵을 던진다거나 하는 폭력적인 상황들이 아무렇지 않게 등장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심의 결과는 어떻게 나왔을까. 온라인 매체 <스타뉴스> 보도에 따르면 방심위는 “작가의 표현 범위가 줄어들 수도 있다. 이런 장면을 문제 삼는다면 범죄물도 만들어질 수 없다”고 설명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권고 조처를 받은 티브이엔 드라마 <더케이투> 4회 목욕탕 액션 장면. 프로그램 갈무리
과연 이 해명만으로 “시대를 거스른다”는 비판을 막을 수 있을까.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부분은 또 있다. 같은 날 심의에 상정된 티브이엔 금토드라마 <더케이투>는 10월1일 방영된 4회의 목욕탕 액션 장면이 문제가 돼 방심위로부터 ‘권고’ 조처를 받았다. 경호회사에 들어간 남자주인공이 목욕탕에서 다른 경호원들과 시비가 붙어 벌거벗은 채 싸우는 장면이다. 행정지도에 속하는 ‘권고’는 관계자 징계·경고 등에 비하면 낮은 수준의 제재다. 방심위는 모자이크 처리를 통해 노출이 심하진 않지만 방송 시간대가 비교적 이른 저녁 8시라는 점을 이유로 들어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27조(품위 유지) 5호를 어겼다고 판단했다. 동일한 심의 규정을 두고 두 드라마의 희비가 엇갈린 셈이다.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