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미국에서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면서 축음기 음반을 틀어주는 ‘디스크자키’(디제이)란 신종 직업이 등장한다. 하지만 음악 이야기를 들려주는 진짜 디제이는 35년 등장한 마틴 블록이다. 한국에서는 64년에야 첫 디제이가 나타난다. 국내 첫 팝송 프로그램인 <동아방송> ‘탑튠쇼’의 최동욱(81·사진)씨다. 63년 애초 피디를 맡았던 그는 이듬해 임시 대타로 진행까지 맡으며 음악생방송 시대를 연다. 이어 개발한 리퀘스트 생방송 프로 <3시의 다이얼>로 한국 디제이계의 독보적인 존재가 된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넘게 지난 지금도 ‘3시의 다이얼’은 생방송 중이다. 한국방송디스크자키협회 명예회장이기도 한 그는 지난해 6월부터 매주 일요일 오후 3시 서울 종로2가 ‘문화공간 온’에서 ‘3시의 다이얼’을 진행하고 있다.
“음악은 그 시대 사람들이 사는 세상과 생각을 반영한 최고의 문화라고 생각해요.” ‘영원한 현역 디제이 최’를 지난 10일 만났다.
‘한겨레’ 주주·독자 만든 시민공간
문화공간 온 매주 일요일 오후 출연
“세대문화 공유하는 이들과 소통”
1964년 첫 생방송 리퀘스트 시작
LA시절에도 11년간 음악방송 계속
“도전해온 팔십평생 ‘한겨레’ 닮아”
최동욱 디제이는 지난해 6월부터 매주 일요일 오후 3시 서울 종로2가 문화공간 온에서 ‘3시의 다이얼’을 진행하고 있다.
문화공간 온에서는 지난해 10월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촛불집회가 시작되면서 매 주말 <한겨레> 주주를 비롯한 시민들로 뜨거운 열기를 뿜는다. 상대적으로 일요일엔 한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오후가 되면 느긋하게 휴일을 즐기려는 음악팬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다시금 온기를 덥힌다.
“40년 전 고교생 시절 엽서를 보냈으나 듣지 못한 노래, 비틀스의 ‘예스터데이’를 다시 한번 신청하겠습니다.” “아! 그래요? 40년 팬을 이제라도 만나니 기쁩니다. 오늘은 신청이 밀리지 않았으니 안심하고 들려드리겠습니다.”
때로는 ‘안녕하세요’의 가수 장미화씨처럼 ‘디제이 최’와 친분이 있는 왕년의 인기 가수와 프로듀서, 방송인들이 놀러와 자연스럽게 청취자들과 노래로 추억으로 어울리기도 한다. 계절에 맞는 대중적인 곡을 선정해 다 함께 부르는 싱어롱으로 마무리 짓는다.
그는 고교 시절부터 팝송에 관심이 많았다. 친구들과 팝송을 들으며 엘피(LP)판을 사서 모았다. 고려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하면서 클래식 합창단을 만들기도 했고, 미국대사관 공보실에서 엘피판을 빌려 듣기도 했다. 매주 작곡가나 음대 교수를 모시고 감상회를 열어 음악에 대한 지식과 소양을 쌓아나갔다. 군대를 마친 59년, 뮤직홀 ‘디쉐네’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면서 토크(talk)를 넣는 정식 디제이로 데뷔한다. 그 이전에는 ‘판’만 트는 플레이어가 있었을 뿐이었다. 소문이 나면서 여러 뮤직홀에서 그를 뽑아갔다. 그는 가는 곳마다 디제이의 전형을 만들고 후배들과 더불어 스스로를 훈련시켰다. 61년 그는 유일한 팝방송인 ‘히트 퍼레이드’의 프리랜서 피디로 발탁된다. 62년 동아일보사는 <동아방송> 개국을 앞두고 그를 특별 채용한다. 음악 분야 총괄 프로듀서로 프로그램 12개를 담당하게 된 것이다. 그중 하나인 ‘탑튠쇼’에서 그는 처음 생방송으로 아나운서 대신 마이크를 잡는다. 드디어 라디오 방송 디제이 시대가 열린 것이다.
64년 그가 아이디어를 내어 시작한 ‘3시의 다이얼’은 67~69년 연속해서 전국 라디오 청취율 1위를 기록할 정도로 히트를 쳤고, 지금까지도 똑같은 프로그램이 나오질 못할 정도로 그 독특성을 자랑했다. ‘3시의 다이얼’은 생방송 전화 리퀘스트를 받았다. 기존의 녹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다행히 동아방송에는 전화 신청 뒤 3분 안에 곡을 찾아 틀 수 있을 정도로 소장 음반이 많았어요.” 풍부한 자료와 탁월한 그의 음악적 전문지식으로 타 방송사에서는 감히 시도할 수 없었던 생방송 리퀘스트를 진행한 것이다. 토·일 주말까지 2000일 넘게 단 한명의 대타도 없이 진행한 ‘3시의 다이얼’의 후속편은 70년 개발한 ‘0시의 다이얼’이다. 심야 음악 생방송의 시작이자 전범이 됐다.
그는 78년 잠시 ‘외도’도 했다. <스포츠동아>가 창간되자 방송·영화·레저·음악 분야를 총괄하는 담당 기자로 스카우트된다. 그는 과학적인 자동차 운전법, 자가 수리법, 드라이브 코스 등 한국 최초로 신문에 자동차 칼럼을 썼다. 드라이브 코스는 훗날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6권)로 출간되어 운전자의 필독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음악방송이 하고 싶었다. “그사이 디제이는 젊은 사람들 차지가 되어 있었죠.” 기성 디제이들이 설 땅이 없었다. 그는 재충전과 음악자료 수집을 위해 91년 미국행을 감행한다.
92년 로스앤젤레스(LA) 한인방송 사장을 맡은 그는 11년간 디제이로도 활동했지만 늘 한국이 그리웠다. 그는 희귀 음반 1만여장을 수집하고, 새 시디를 포함해 모두 300만곡을 확보하고, 2천여권의 각종 음악자료와 2억원에 이르는 방송 장비를 가지고 2003년 돌아온다.
귀국 뒤 다시 심야 생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하고 음악피디로도 활동했지만 그는 음악을 사랑하는 청취자들과 직접 소통하고 싶었다. 그는 2005년 1인 인터넷 방송 ‘라디오서울코리아’(radioseoulkorea.com)를 직접 개국한다. 확보한 300만곡 중에서 정선한 명곡과 히트곡 등 17만곡을 컴퓨터 파일로 저장해 신청곡을 받으면 3초 안에 틀어줄 수 있기에 가능했다. 풍성한 음원과 전문적인 해설, 최고의 음질 덕분에 매일 4천~5천명의 청취자가 찾아온다.
“문화공간 온은 같은 세대 문화를 공유하는 팬들과 직접 만날 수 있는 오프라인 공간이어서 좋아요. 순수한 투자자가 나선다면 온·오프를 연결한 음악방송도 새로 시도하고 싶어요.”
그의 삶은 ‘도전 인생’이다. 기존의 관행을 깨는 그의 도전정신은 ‘한겨레 정신’과도 닮았다.
글·사진 김미경 주주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