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기에 돌입한 일본 드라마 신작들 가운데 국내 팬들의 큰 관심을 모은 작품이 있다. <티비에스>(TBS)의 새 일요극장 <미안하다, 사랑한다>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2004년 <한국방송>에서 방영된 소지섭, 임수정 주연 드라마를 원작으로 했다. 당시 수많은 ‘미사’ 폐인을 양산한 작품의 리메이크인데다, 나가세 도모야, 요시오카 리호, 사카구치 겐타로, 이케와키 지즈루 등 국내 팬들에게도 낯익은 스타 캐스팅으로 기대가 높았다. 첫 회 대부분이 서울 로케이션 촬영분이라는 점이나 이수혁이 나가세 도모야의 한국 지인으로 특별출연한다는 점도 눈길을 끈 요소였다.
마침내 지난 9일, 첫 방송을 내보낸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이런 기대를 완전히 배반한다. 원작의 약 3회분에 해당하는 내용을 한 회에 압축한 이야기는 상실과 고독의 비극적 세계 안에서 움튼 주인공들의 운명적 인연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고, 한·일 양국을 오가는 편집은 뚝뚝 끊기며 몰입을 어렵게 만들었다. 서울 촬영분은 문화방송 <신기한 TV 서프라이즈>의 재연극을 연상시키는 어색함의 극치였고, 심지어 주연배우들의 연기마저 양국에서의 편차가 보일 정도였다. 낯선 한국어 대사를 소화하느라 다소 굳어 있던 나가세 도모야는 일본에서의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비로소 표정이 자연스러워진다.
원작이 리메이크작에 비해 대단한 작품이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일본판을 제일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방법은 리메이크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드러난 한국 드라마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발견해내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국내에서 원작이 신드롬급 인기를 누렸던 시절은 13년 전이다. 외환위기의 그늘을 벗어나려 몸부림치던 그때, <가을동화>, <아름다운 날들>, <겨울연가>, <천국의 계단>처럼 최루성 멜로물이 대중을 사로잡았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그 시절 감성의 정수와도 같은 멜로다. 입양아, 미혼모, 장애, 시한부 등 눈물샘을 자극하는 온갖 설정이 버무려져 있고, 인물들의 행동은 자해에 가까울 만큼 격렬했지만 대중은 환호했다. 물론 극단적 비극에 처한 인물들의 심리를 끝까지 몰아붙이는 각본과 연기, 비극을 더욱 부각시킨 영상미의 덕도 크다.
하지만 2017년의 리메이크는 그동안 시대가 얼마나 바뀌었는가를 실감하게 한다. 그 시절의 맥락을 제거하고 나니 남는 건 시대착오적 감수성뿐이다. 자기 안의 슬픔만 바라보는 남주인공의 행동은 너무도 폭력적이고, 짝사랑 상대에게 감정노동을 기꺼이 착취당하는 여주인공은 어이없을 만큼 수동적이다. 실제로 지난해 본격적으로 공론화되기 시작한 한국 로맨스의 유구한 ‘데이트 폭력’ 묘사에서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거의 단골 교재처럼 언급된다. 더 서글픈 것은 아직도 많은 한국 드라마들이 이러한 한계를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판 리메이크는 의도치 않게 그 지점을 건드렸다. 서울 촬영분에서 조직폭력배를 거느린 재벌 후계자가 등장하는 장면에 이르면, 이 리메이크의 목적은 한국 드라마의 클리셰를 폭로하기 위한 것인가라는 음모론까지 제기하고 싶어진다.
김선영 티브이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