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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스크린 속 나의 연인- 안성기

등록 2006-03-08 18:02수정 2006-03-23 16:38

80년대 장동건이자 원빈이자 설경구였다
첫키스, 첫사랑, 첫경험…. ‘처음’이라는 말의 의미에 포함된 ‘설레임’이라는 느낌을 떠올릴 때면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1985년 과외 아르바이트를 땡땡이치고 내 인생에 처음으로 본 성인영화, 배창호 감독의 <깊고 푸른 밤>이다.

미국에서의 성공을 꿈꾸며 오로지 영주권을 얻기 위해 계약결혼을 했던 백호빈과 제인. 결국 미국시민권을 얻은 남자의 욕망과 그에게 사랑을 느끼고 만 여자가 충돌하고 맺게 되는 비극적 결말의 영화이다. 마지막 이혼여행 길에 올라 사막에서 허망하게 죽어가는 안성기와 장미희의 모습과 함께 아직도 잊지 못할 몇 개의 장면들이 머리 속에 박혀있다. 로맨틱한 키스씬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던 내게 누구보다 젊고 매력적인 모습의 안성기와 온통 뼈밖에 안 남아있던 장미희의 베드씬이 준 충격은 꽤나 컸다. 요즘의 성인영화들과는 비교도 안되는 낮은 수위 였지만 내겐 안성기라는 배우가 영화 속에서 보여준 처음이자 마지막인 섹시한 남자의 이미지였기에 그리고 내가 본 첫 성인영화라는 의미로 마음이 울렁거렸는지도 모르겠다. 셀 수 없이 많은 그의 영화 중에서 가장 연민이 가는 악역이었다는 것이 또한 내 마음을 사로 잡았다.

그후로도 그는 <적도의 꽃>에선 훔쳐보는 남자로, <고래사냥>에선 기인 같은 거지로, <겨울나그네>에선 기다리는 남자로, <공포의 외인구단>에선 패배자들의 혹독한 감독으로,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는 한 여자를 서툴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지고지순한 남자로 다가왔다.

지금도 완벽한 미남 장동건에게는 가슴 떨림을, 원빈의 미소에서는 모성본능을, 설경구에게서는 인간을 느끼지만 80년대를 대표하는 수많은 영화의 주인공으로 전성기를 누렸던 당대 최고의 배우 안성기는 그 모든 것을 혼자서 다 만족시켜주는 남자였다. 당시에는 안성기 주연이라고만 하면 두말없이 그저 ‘좋은 영화’라는 신뢰를 느꼈고 최고의 티켓파워를 발휘하는 배우란 것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영화배우는 극장에서만 볼 수 있었던 시대를 함께 소비한 세대에겐 그야말로 하늘에 떠 있고 마음 안에 떠 있는 ‘스타’ 그 자체였지만 컴퓨터만 열면 쏟아지는 스타의 소식에 익숙한 요즘 세대에게 ‘안성기’라는 이름의 배우는 그 의미가 많이 다를 것이다.

<실미도>가 대한민국 흥행사에 가장 먼저 관객 1천만명을 넘어서면서 온 국민이 그 화제에 댓글로 무분별한 애정공세를 펼치던 무렵의 일이었다. 어느 영화평 아래에 “안성기도 연기 좀 하네?”라는 누군가의 댓글이 달려 있었다. 아마도 오랜시간 부드럽게 커피를 권해주는 아저씨로만 알고 있는 초등학생 정도의 한줄 평이었겠지만 그 나름대로는 대단한 발견이라도 했다는 듯 자랑스럽게 올린 것을 보며 많이 웃었다. 완전히 바뀐 세상에서 완전히 달라진 ‘스타’의 존재를 돌아보게 했던 상징적인 말이었다.

그저 막연하고 열렬한 팬으로만 가슴속에 담고 있었던 당대의 배우를 난 어느 순간 영화광고 디자인을 직업으로 가지면서 만났다. <그대안의 블루> <남자는 괴로워>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 등을 통해 그의 사진을 오리고 자르고 카피를 얹어 포스터를 만들면서 행복했다. 오랫동안 좋아했던 환상의 인물과 내 손끝으로 만나게 될 줄은 감히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으니 남들은 절대로 알 수 없는 혼자만의 벅찬 기쁨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소심한 남자, 정의로운 남자, 부실한 가장, 웃기는 경찰, 로맨틱한 대통령, 냉정한 군인, 귀여운 장풍선생까지 그는 여전히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내뿜는다. 모두에게 존경 받는 이 국민배우와 함께 나도 어느덧 같은 ‘영화인’이라는 이름으로 산다. 최근엔 직접 만나 오랜 팬이었음을 고백도 할 수 있었고 <라디오스타> 라는 영화의 자막에 이름을 같이 올릴 수 있는 기회도 맞이했다. 내가 처음 그에게 반했던 영화 <깊고 푸른 밤>의 백호빈을 21년만에 만날 수 있다는 것, 그게 바로 ‘영화 같은 내 인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정승혜/영화사 아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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