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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필진] <한반도>, 정말 역사를 바로 세우자는 말인가?

등록 2006-07-21 15:59

강우석 감독의 <한반도>
강우석 감독의 <한반도>
영화 포스터 영화를 보면서 상영시간 내내 영화의 내용을 무시한 채 사회적 화두에 대해서 매달려보기는 처음이다. 그것이 절대적인 작품의 의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상업화의 색깔 속에 덧칠해진 의미에 지나치게 매달린 예민한 성격 탓이었을까? 영화를 영화로만 볼 수 있는 순수 예술주의를 동경하면서도 영상 언어들 속에 기록된 사회 이슈들을 읽어내기만 하면 순간적으로 그 순수성을 포기한 채 이념 논쟁 속으로 휩쓸려 들고야 마는 덜 된(?) 관객에게 영화 <한반도>는 처음부터 예민한 사회적 화두를 던지고 있었다. 그러니 어찌 순수한 관객의 모습으로 관람을 할 수 있었겠는가?

애국주의인가? 현실주의인가?

<한반도>는 애국주의적 결론을 전제로 하고 있으면서도 시종일관 애국주의와 현실주의 사이의 대립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주요 논점 중 하나인 것은 그것이 영화를 둘러싸고 있는 의미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조차 치열하게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일각에서는 강우석표 애국주의를 비난하면서 역사 바로세우기와 같은 과거주의적 발상은 오만이라고 일갈한다. <한반도>의 제작자들은 현실 정치와 경제, 세계 환경을 무시한 비현실적 이상주의자들일 뿐이라고 매도한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 편에서는 민족적 자긍심을 버리고 빵을 구걸하는 현실주의자들의 비상식을 비난한다. 민족의 주권과 자존심을 포기하고 얻을 수 있는 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반문한다.

영화에서 분명하게 대립되고 있는 이 두 진영 중 관객들은 어디에 속할까? 이미 2백만이 넘는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갔다는데 그들은 이 둘 중 어느 진영에 속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객석을 일어섰을까? 민족의 자존심을 세우고자 애쓴 강우석 감독의 의도는 성공했을까? 일본의 언론에서 매도하는 언어도단처럼 강우석은 반일 비즈니스에 성공하고 있을까? 정말 이 영화와 우리 사회는 이분법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걸까?

다행히 강우석은 젊고 유능한 국정원 서기관(차인표 분)을 내세워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이면을 보여주려고 애쓴다. 그것은 애국주의와 현실주의의 간극에서 우리가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를 모색하는 대다수의 국민들의 정서이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역시 빵일 수 있다. 먹고 사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을까? 그래서 정치인들은 대게 위기가 닥치면 그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민생정치 최우선을 운운하는 것 아닌가! 경제는 국가의 근간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자존심을 버리면서까지 빵을 구걸한다면 어찌하겠는가! 미국 의회에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던 패트릭 헨리의 외침을 이해하지 못하는 대한민국 국민들은 없다.


빵 보다도 자유가 더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의 자존감이 빵으로부터 오지 않고 자유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자유는 침해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가치이다. 양심과 선택, 표현은 모두 한 개인의 고유한 가치인 자존권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이것들이 침해된다면 한 인간의 천부적 권리는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인류가 끊임 없이 추구해온 인권의 가치가 여기에 있다.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한 나라의 자존감은 스스로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 확립된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자신의 나라의 운명은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 그것을 대신해 줄 그 어떤 나라도 용납될 수는 없다. 특별히 한 민족의 통일과 같은 우리 사회의 절대적 과제는 더욱 더 그렇다. 이미 외세의 개입으로 이산과 전쟁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던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통일만큼은 우리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야 하는 것보다 더 중대한 과제는 없다. 따라서 통일이야 말로 빵보다도 더 중요한 사회적 과업임에 틀림없다.

실용적 애국주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문제를 위해 6자 회담을 해야 하고, 미국과의 FTA, 일본과의 적당한 협정을 맺어야만 하는 오늘의 국제 정세는 빵을 무시할 수 없는 국제 질서의 야속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이상현(차인표 분)과 같은 이 땅의 엘리트들이 신자유주의의 질서에 편승해 나라를 이끌어가고자 하는 것이리라.

민족의 자존심을 세우고자 하는 신념으로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대통령(안성기 분)과 국제 질서에 따라 국가의 이익을 고려해야만 한다는 국무총리(문성근 분), 이 두 애국주의와 현실주의의 사이에 서서 무엇이 더 중요한 지를 보여주는 국정원 서기관(차인표 분)의 역할은 무엇으로 규정해야 할까? 실용적 애국주의(pragmatic patriotism)이라고 해야 하나? 정치권에서는 자주 쓰는 용어 중 하나이긴 한데 이 표현, 즉 ‘실용적’이라는 용어가 어울리는 단어일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이 땅의 국민 대다수는 바로 이런 입장에 서 있을 것이다. 지나친 애국주의를 적당히 비평하면서도 의식 없는 현실주의는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정신으로 역사와 민족이라는 대한민국사(史)의 화두를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는 게 바로 우리 국민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교훈이 한 가지 있다. 실용적 애국주의(그냥 그 표현이 가장 어울릴 것 같아서 계속 사용한다. 이 표현에 사족을 달지 않기를...)는 비난받을 수 없는 대세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독제는 아니다. 그것은 올바른 가치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잠재력일 뿐이다. 영화에서 이상현은 자신의 선배 최민재(조재현 분) 박사의 의지를 통해 현실을 재조명함으로써 무엇이 옳은 길인지를 깨닫게 된다. 실용적 애국주의의 길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는 진실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가능성을 현실화시킨 것은 바로 최민재의 신념이었다.

결국 대한민국 현대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원동력은 바른 역사의식과 민족적 자존감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대다수의 정신 속에 숨어 있는 진실담론의 의지를 일깨울 때 <한반도>와 같은 통쾌한(?) 결론이 우리 사회에서도 현실화 될 수 있다. 결국 애국주의로 돌아가는 환원론이 아니냐고 또 다시 따지고 들면, 강우석이나 나나 별로 할 말은 없다. 똑 같은 영화, 똑 같은 칼럼을 쓸 수밖에... 아 하! 그래서 역사를 바로세우자고 하기만 하면 여전히 찬반양론으로 맞서서 팽팽한 샅바싸움만 벌이고 있는 거겠지.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더라도 그 논쟁의 현장에 서서 계속 지켜보아야겠다. 아니! 그럼 안 되지! 고래가 되어 나도 피터지게 싸워 볼까나...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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