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무총리류(문성근 분)
‘한반도’를 구실로 친일파 때리기
‘한반도’ 성도착증 환자의 자위행위 같은 영화 영화 ‘한반도’에 대해 혹평이 쏟아지고 있는 것 같다. 영화를 시작하면서 부터 작은 쇠붙이 하나의 진위여부가 한일 두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만화적인 상황설정은 한국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일본을 극복할 수 없다는 무언의 한계를 설정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 쇠붙이의 존재가 진실이라는 이유 하나로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자아도취는 마치 성도착증 환자의 자위행위를 보는 듯 했다. 최근의 시대물을 보면 언제나 느끼는 아쉬움은 리얼리티의 상실이다. 역사란 팩트에 역사를 관찰하는 관찰자의 시각이 가미된 일종의 픽션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픽션의 영역에서 조차도 넘지 말아야 할 부분은 분명 존재한다. 이 영화에서 고종의 신분은 황제이다. 영화가 국수주의의 향수를 상품화 하고 있음에도 제국의 황제를 ‘전하’라고 부르는 오류를 거침없이 범하고 있다. 제국에서 ‘전하’는 왕들에 대한 호칭이며 황제에게는 ‘폐하’라는 존엄한 호칭을 써야 하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이다. 또 한 가지 드러나는 오류는 대신들의 관복이다. 대한제국 황실의 대신들이 조선왕조의 관복을 입고 등장하는 것은 영화제작진이 자랑스럽게 떠벌인 ‘철저한 고증’이 수박 겉핥기에 불과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창작물에서의 픽션은 철저한 사실을 근거로 할 때 보다 완벽한 스토리를 연출하기 마련이며 보다 큰 감동을 주기 마련이다. 영화 속의 친일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건진 것이 하나 있다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친일캐릭터의 재발견이다. 구한말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매국노들과 같은 부류의 친일매국노의 잔당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중추를 장악하고 있다는 상황설정은 만화 같은 영화가 갑자기 시사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지게 할 정도로 나를 자극 했다. 그들이 펼치는 논리 또한 우리 사회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친일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영화에서 구체적인 친일 행위는 크게 두 부류로 분류되고 있다. 영화에 등장한 국무총리는 “일제의 지배가 우리 근대사의 축복”이라고 강변한 ‘한승조’ 류의 뻔뻔한 친일파와 맥을 같이 한다. 그는 일제의 ‘압제’가 우리 근대사의 필요악이었으며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일본 미국의 이익이 대한민국의 이익과 일치한다고 강변한다.그들의 눈에 비친 대한민국은 일본과 미국이 빠져나가면 30년도 지탱할 수 없는 허약한 나라에 소란스런 국민들이 존재할 뿐 이다. 하지만 그들이 바라는 세상은 자주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이 아니다. 매국의 대가로 얻은 부정한 기득권 예컨대 부정한 축재(蓄財), 부당한 권력, 사회적 명성 등 모든 것을 자자손손 세습할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들은 이런 세상을 얻기 위해 그들이 가진 모든 권력을 동원해 자신들의 논리를 일반화하려 하고 있고 그 것은 실제상황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한승조. 지만원. 조갑제 등은 문성근류 친일파의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으며 조선. 동아 등의 수구 언론은 그들의 효과적인 무기일 것 이다.

이상현류( 차인표 분)
이 상현은 영화 중반부까지 총리의 논리에 동조하여 최민재(조재현 분)의 국새발굴작업을 집요하게 방해한다. 상현이 영화 후반부에서 총리가 옳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민재를 돕게되는 것은 그가 총리의 논리에 기만당해 친일행위조차 ‘애국’의 한 길이었음으로 착각하였음을 의미한다. 상현류의 친일파는 거리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대부분의 장삼이사들이다. 그들은 친일 행위를 함으로서 자신들에게 별 다른 이익이 발생하지도 않고 스스로 친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한승조 류’의 논리에 기만당해 자신들의 밥그릇을 빼앗아간 주구들의 입장을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안의 적이 더 무섭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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