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나라에 참 소중한 배우가 있다. 바로 최민식. "Korean Actor"라는 수식어가 무색하지 않을 만큼 최민식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한국적으로' 또 '다양하게' 소화해낸다. 물론 이 의견에 반박할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태어나 자라고 한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한글로 된 대사를 말하는데 한국적으로 소화해내는 게 뭐 그리 특별한 장점이며, 배우는 당연히 다양한 연기를 보여줄 줄 알아야하는데 그게 뭐 대수냐고 말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최민식과 함께 꼽히는 배우 설경구와 송강호의 연기를 보자. 설경구의 연기에서 헐리웃 배우들의 표정을 읽을 수 있는 건 비단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의 연기는 탁월하지만, 아쉽게도 한국적인 냄새는 맡기 힘들다. 송강호는 경우가 조금 다르다. 그는 실로 엄청나게 한국적인 냄새를 풍긴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 아저씨' 분위기만을 갖고 있어 한계가 있다. 껄렁껄렁하고 비전 없는 동네 깡패 역할도, 음탕하지만 소신 있는 화가 역할도, 15년 감금당해 어리숙하던 오대수 역할도, 작은 학교의 음악 선생님 역할도, 전직 복서였던 타락한 아저씨 역할도……. 모두 한국적으로, 또 다양하게 연기한 배우가 바로 최민식이다. 최민식의 영화는 본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소개하는 것에 큰 의미가 없겠지만, 그럼에도 굳이 꼭 한 편 소개하고 싶은 영화가 있다.


강재의 마음은 어땠을까? "삼류 양아치" 소리를 들으면서 지낸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파이란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이 동시에 들었을 것이다. 결코 헛된 감정이 아니었을 것이기에 그들의 이상한 사랑은 참으로 사람 가슴을 울린다. 안타깝게도 파이란이 죽었다는 소식이 오고, 죽은 파이란의 보호자로서 강재가 그의 주검을 확인하러 병원에 간다. 위장결혼을 주선했던 친구녀석이 "위장결혼 들통나지 않게 대충 슬퍼하는 연기만 해줘."라고 말한다. 강재는 주검을 확인하러 들어간 방에서, 울지도 못하고 어쩌지도 못하고 가슴을 부여잡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눈치없는 친구가 "아니 너 연기 너무 하는 거 아니냐? 이제 안해도 돼."라고 말하지만 강재에게 그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파이란은 내가 최민식의 영화 중에서 맨 처음으로 접한 영화이기도 하다. 난 가장 놀랬던 게, 편지를 읽는 최민식의 표정이 나를 울렸다는 것이다. 편지를 최민식이 소리내서 읽는 것도 아니고 그저 편지를 보는 표정만 보일 뿐인데 그 표정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감정을 대사에 싣긴 쉬워도 표정에 싣긴 어렵다고들 하지, 아마. 게다가 대사보다 표정이 더 인상적인 법이라 유명한 명장면은 표정이나 동작 장면들이 많다. 어쨌든 내게 남아있는 최민식의 표정은 앞으로도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이 한국적인 배우는, 한국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도 끔찍하다. 스크린 쿼터 축소 반대 집회에 한 번도 빠짐없이 얼굴을 비춘다. 자기 주머니 챙기느라 저런다고 욕먹고, 과격한 운동권이라고 욕먹어도 그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망설임이 없다. 국민과의 인터넷 대화라는 슬로건을 놓고, 노무현이 이준기 등 신인 영화배우를 초청해다가 이야기하는 중 이렇게 질문했다. 노무현 : 나는 그렇게 묻고 싶어요. 우리 영화인들, 그렇게 자신이 없어요? 스크린 쿼터 축소가 가져올 영화계의 위기를 전혀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질문이었다. 이 엉뚱한 질문을 들은 최민식이 대답했다. 최민식 : 저도 묻습니다. 이 냉엄한 국제 현실 속에서 자신만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우문현답, 아니 우문현문이다. 최민식은 어느 인터뷰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 후보였을 때 '아침 이슬'이란 투쟁가를 들으며 눈물 흘리는 CF를 보았고, 아 저런 사람도 있구나라는 생각에 주저없이 그에게 한 표를 던졌지만 지금은 후회한다고 말했다. 아침 이슬 노래에 눈물 흘릴 줄 아는 대통령이 자국의 문화를 미국에게 팔았다는 사실에 최민식이 느꼈을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최민식이 스크린 쿼터 축소 반대 집회에 참석하고 목소리를 내는 모습은 사람들마다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다. 갑자기 제 돈줄 사라지려 하니 오바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멋있다고 존경심이 든다며 응원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전자가 맞든 후자가 맞든간에 최민식의 행동이 의미있는 것은, 이것은 결코 '연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연기를 주업으로 삼는 배우이기 때문에 절실한 표정 하나 제대로 연기 잘 해서 카메라에 찍혀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스크린 쿼터의 모순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기 위해 자그마치 2년동안이나 쉬지않고 공부하여 구구절절히 호소하는 그의 모습은 연기라고 보기엔 어려운 부분이 너무나 많다. 파이란이 죽어서 가슴 아파 어쩔 줄 모르는 강재와, 스크린 쿼터 축소 위기에서 힘겹게 싸우는 최민식, 참 닮았다. "이제 그만 해도 돼, 너무 연기 하는 거 아니야?"라고 말했던 강재의 친구처럼 최민식을 안 좋게 보는 사람들도 "이제 그만 오바해라."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최민식의 귀에 그 소리가 들릴 리가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하지 않을까? 운동, 집회, 이런 이미지가 붙어버린 최민식을 보고 사람들은 그의 연기 생활을 걱정하지만, 고맙게도 최민식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런 기회가 아니었으면 내가 언제 농민의 거친 손을 직접 잡아보고 그들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었으며 민주화를 몸으로 이해하는 영광을 어찌 누렸겠는가. 학생 때 구경한 싸움이랑 중늙은이가 돼서 직접 거리에서 싸우는 거랑 너무 다르다. 하나하나 내 영혼에 축적하고 있는 중이다. 소중한 자산이 돼가고 있다.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어서 하나도 힘들지 않다. 오늘 8월 1일부로 스크린 쿼터 회복 2단계 투쟁이 시작되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이 사상 최다 스크린을 석권하면서 대박 예감을 잔뜩 풍기는 기쁜 와중에 영화인들이 청와대 앞으로 나와 묵묵히 싸운다. 매번 한국영화가 괴물처럼 대박을 터뜨릴 수도 없고, 괴물처럼 대박 요소가 있다손 치더라도 스크린 쿼터가 막고 있다면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진짜로 투쟁하는 가장 첫번째 이유는, 한국 영화의 생명이 보장되어야 한국 영화의 다양성이 성장하고 한국 영화의 독창적인 색깔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에게 응원의 기도를 보낸다. 나 역시 그들이 하는 일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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