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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친절하고 밝아진 ‘홍상수식 변곡점’

등록 2006-08-28 19:41수정 2006-08-28 19:47

무기력남·푼수녀의 여행지 사랑
‘살가운’ 여주인공에
젊은 세대에 보내는 기대 담아
영화 ‘해변의 여인’

〈해변의 여인〉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 가운데 가장 많이 웃기며 가장 덜 불편하다. 그의 다른 어떤 영화들보다도 인물들이 말을 통해 소통을 한다. 침대에 누워 얘기를 나누는 베드신은 있어도 섹스신이 없다. 그래서 대사가 많고, 인과관계가 부드럽게 이어지는 이 영화는 홍상수 영화 중에서 가장 친절하고 쉬워 보이기도 한다.

영화감독 중래(김승우)가 시나리오를 쓰려고 서해안을 찾아간다. 이혼남이며, 그리 잘나가는 감독 같지도 않다. 여차저차해서 음악가 문숙(고현정)과 동행하게 되고 하룻밤을 잔다. 다음날 문숙은 떠났다. 혼자 바닷가 마을에 남은 중래는 모래언덕에서 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여하간 문숙이 예사롭지 않은 느낌을 남긴 듯하다. 그 마을에서 문숙과 닮은 듯한 유부녀 선희(송선미)를 만난다. 여차저차한 과정을 거쳐 선희와 자는데, 그날 밤 문숙이 중래를 찾아온다. 또 여차저차하게 중래는 그날 밤의 위기를 넘기고 다음날부터 며칠간 문숙과 지낸다. 그러나 결국 그날 밤의 일이 사단을 불러온다.

이렇게 요약하면 썰렁한데, 중요한 건 ‘여차저차’한 것들 속에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중래는 매사에 회의적인 반면, 문숙은 매사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쪽이다. 중래가 무기력하다면 문숙에겐 푼수끼가 있다. 그래서 중래의 무기는 무책임해지는 것이고, 문숙의 무기는 영악해지는 것이다. 이런 두 캐릭터의 만남(영어로 ‘어페어’)을 중계하면서 세심한 디테일의 묘사와 그것들의 충돌로 관객들을 많이 웃게 만든다. 홍상수의 전작들이 털이 굵고 강한 칫솔이었다면, 이번 영화는 가늘고 부드러운 미세모 칫솔인 셈이다. 하지만 이런 설명도 여전히 불충분해 보인다.

영화 속에서 중래가 문숙에게 말한다. 사람이 여러 변곡점을 가진 복잡한 형상인데, 그중 몇개의 점만 가지고 그 사람을 그리려 하면 왜곡된다고. 이건 홍상수의 영화 철학의 하나이기도 하다. 몇 개의 점으로 자신이 그리는 대상이 왜곡되는 일이 없게 하겠다는 것. 그런데 문숙과의 대화 속에서 중래의 이 말은, 자신이 선희와 잔 걸 유념하지 말라고 문숙을 꼬드기는 치사한 핑계로 동원된다. 이런 다층적인 맥락 속에서 영화는 중래로 대표되는 한 세대, 한 유형의 인간군(굳이 말한다면 30대 후반부터 40대의 회의적 지식인들)에 대한 씁쓸한 풍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영화를 홍상수 영화 중에서 가장 밝아 보이게 하는 건, 영화 속 문숙의 모습이다.

홍상수 영화의 여자들이 남자들의 시선에 비친 여자이거나, 어떤 이념형으로서의 여자에 가까웠던 데 반해 이 영화의 문숙은 캐릭터가 구체적이고 우리 주변에서 보아온 여자 중의 한명 같다. 고현정의 살가운 연기도 한몫 거든다. 영화는 문숙이 뭔가를 느끼고 함박 웃는 데서 끝난다. 다른 세대, 다른 성, 다른 인간형에 기대를 보내는 듯한 느낌이 있다. 31일 개봉.

임범 기자 isman@hani.co.kr, 사진 봄 제공



홍상수 감독
“고현정은 옆에 함께 선 느낌 주는 배우”

<해변의 여인>까지 7편의 영화를 만들고 숱한 인터뷰를 해오면서 홍상수(45) 감독은 인터뷰 자체에 지친 듯했다. “아무래도 난 인터뷰 하기에 적합한 감독이 아닌 것 같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가 영화 만드는 방식이 똑 같고 그래서 같은 말 또 하고….” 그래도 홍 감독에게선, 이런 저런 얘길 하다보면 재미있는 말이 나온다. 쥐어 짜내는 수밖에.

-이 영화를 시작하게 한 모티브가 있다면.

=내가 영화판에서 알던 한 여자와 비슷한 여자를 시골에서 만난 적이 있다. 전혀 모르는 여자인데, 내가 그 여자를 아는 것처럼 미소 짓고 하더라. 그 여자는 나를 생판 모를 텐데. 그런 내 모습이 재밌었다. 그게 출발점이다. 비슷한 두 여자가 있다. 한 여자가 떠나고, 다른 비슷한 여자를 봤다…. 거기에 ‘이미지’라는 말을 넣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영화에서 고현정은 다른 때보다 살쪄보인다.

=나는 찌우라고 한 적 없다.(웃음) 배우들이 열심히 자발적으로 도와줬다. 고맙다. <생활의 발견> 때 후반부에 경주에서의 일들을 찍으면서 김상경에게 혼자 여관가서 자라고 했다. 꿀꿀한 기분에 젖으라는 뜻이었지만 농담처럼 한 거다. 배우에게 어떻게 그런 부탁을 하겠나. 그런데 진짜로 그렇게 하더라. 그런 자발성이 있었는데, 이번 영화에서도 배우들이 그랬다. 내가 배우와 작업하는 방식을 두가지로 나눠 본다면, 하나는 배우 자체가 주는 느낌에 내가 의도하는 모습들을 대입시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배우가 내 의도 안에 들어와 섞이는 것이다. 둘 다 장단점이 있을 텐데, 고현정은 후자에 가까왔다. 고현정은 아침에 쪽지를 주면 바로 반응을 보인다. 어색하고 꺼려지는 대사가 있을 법도 한데, 고현정은 매우 고무적이고 의욕적인 반응을 보인다. 옆에 딱 서주는 느낌을 준다. “우리 같이 가요”하는 느낌.

-중래는 힘들어 하면서도 계속 그렇게 살 것같다. 어떤 자조 같은 게 느껴진다.

=나는 자조는 안 한다. 다 같이 아이러니를 하지. 자기 연민적인 자조는 재미가 없다. 그건 도망갈 구멍이 있으니까 하는 거다. 나는 정말 안 되면 스케치북에 그림 그리면서 소주 마시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되는 거지, 자조는 안 한다. 자조는 아직도 어떤 대상에 어린애처럼 기대는 거다. 응석이다. 그것도 폼이고 허구이다.

-홍 감독 영화에서 처음으로 섹스씬, 노출씬이 없다.

=고현정이 기자회견에서 자기 때문에 노출씬을 못 찍은 것같아 미안하다고 하던데, 참 말도 잘해.(웃음) 그게 아니고, 난 처음부터 안 찍으려고 했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때 베드씬 찍기가 참 힘들었다. 다음부터 안 해야지 했던 것 같은데, 그게 목까지 차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극장전>에서 한번 더 하고 나서, 마음을 굳혔다. 앞으로도 안 하려고 한다. 단, 노출이 어떤 다른 쾌감이나 생명력을 줄 수 있으면 할지는 몰라도, 이전과 같은 톤으로는 안 한다.

-문숙의 캐릭터가 무척 현실감이 있다. 문숙과 중래가 마지막까지 다투는 게, 문숙이 중래가 묶는 펜션 문밖에서 잘 때 중래와 선희가 문숙을 넘어서 나갔느냐 여부이다. ‘날 넘어갔단 말이야?’하고 따지는 그 모습이 여러모로 재밌다. 그 캐릭터는 그런 걸 중요시할 것 같다.

=그 설정은 일찍부터 염두에 뒀다. 왜 자기 발만 넘어가도 난리를 떠는 사람들 있지 않나. 나도 남이 날 넘어가는 것 안 좋아하는 것 같고. 이 영화에선 문숙에게 그게 핑계일 수 있는 거지만.

-마지막 장면이 밝다.

=마지막 문숙의 웃음은 정말 친절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은 뒤에 지어보이는 웃음을 의도했다. 내가 전에 그랬던 적이 있다. 지하철 안에서 어떤 여자가 내 팔을 갑자기 때리는 것이었다. 애 업은 아주머니였는데, 내 팔에 모기가 붙어 있었던 거다. 그 여자는 죄송하다고 했고 실제로 남의 팔을 치는 행위가 실례라는 생각도 했겠지만, 그 이전에 모기가 남의 피를 빨아먹고 있는 걸 보고 있기가 힘들었던 거다. 그만큼 남에 대한 친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때 받은 느낌이 인상적이었다. 그걸 떠올리면서 썼다. 하지만 사실 밝은 이야기도 아닌데. 남자 속이라는 게 그렇게 드러나고, 여자도 어떤 면에선 비슷하고. 밝게 하겠다, 어둡게 하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한 건 아니다. 처음엔 남자 중심으로 끝까지 갈까 하다가, 중간에 여자로 끝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래로 대표되는 우리 세대는 그렇게 늙어갈 거다, 문숙으로 대표되는 너희 세대는 좀 더 씩씩하게 가라. 그런 느낌이 있다.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늙는 게 좋다. 몸이 변해가는 게 좋다. 눈에 노안이 오고, 이런 게 재밌다. 나는 의도를 못 믿으니까. 하지만 몸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니까. 확실한 게 없는 삶에서 늙으면서 오는 신체 변화는 확실하지 않은가. 어릴 때 신 김치 좋아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갓 담근 김치가 맛있어졌다. 내가 의도한 게 아닌데, 확실한 변화가 생긴 거다. 이런 게 재밌다.

임범 기자 isman@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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