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굿나잇 앤 굿럭’
1953년 10월 4일 미국 메이저 방송사 CBS의 뉴스맨 에드워드 R 머로우와 그의 동료들은 뉴스타큐멘터리 ‘SEE IT NOW’를 진행하며,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Joseph McCarthy)가 주도하는 빨갱이 사냥과 맞붙고 있었다. 당시 미국사회는 공산주의 소련에 대한 두려움과 이를 이용하는 선동 정치인인들의 협박 아래 업압적인 분위기였다. 매카시즘이라고도 불리는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은 진짜 공산주의자는 물론, 미국 사회내의 건전한 비판세력과 일반 서민마저도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탄압과 배제의 대상으로 몰고 있었다.
<굿 나잇 앤 굿 럭>은 외부적 상황의 묘사나 다양한 야외 로케이션 없이 CBS 스튜디오와 매카시의 기록필름의 대비를 기본으로 진행된다. 내러티브상의 일종의 몽타쥬가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칼라도 2006년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흑백으로만 처리되었다. 내러티브 상의 심플한 대비와 색깔의 선명한 대비는 냉전시대 아군과 적군을 가르는 흑백논리에 대한 은유인 듯하다.
잘 짜여진 영화구조에서는 내러티브 전개와 영상상의 전개가 긴밀하고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굿 나잇 앤 굿 럭>의 내러티브는 분명하고 단순하다. 대단한 기복과 반전은 없다. 이미 세계사 교과서를 통해서 알고 있던 매카시즘의 광풍과 그 광풍에 맞서 싸운 언론인들의 대항과정을 극화하여 전개해 나갈 따름이다.
극화하였지만 현실감이 사라지지 않고 다큐멘터리같은 진지함과 차분한 설득의 힘을 가지고 있다. 영화가 단지 즐거움을 주는 매체에만 한정되지 않고 역사를 적극 재현하고 역사와 사회에 대한 발언을 하는 매체라는 점을 <굿 나잇 굿 럭>은 보여준다.
언론학 교과서 1장에서는 언론과 저널리즘의 첫 번째 역할로 ‘권력에 대한 감시견(watchdog)’기능을 꼽는다. 그 권력이 반드시 국가공권력일 필요는 없다. 의회이건, 자본이건 언론은 권력을 감시해야 한다. 그것이 언론에 대해서 사회가 부여한 사명이자 언론의 존립 이유이기 때문이다.
지금 언론은 스스로 권력으로 군림하기도 하지만 광고자본에 대해서는 수세적이다. TV는 오락프로그램 일변도이며 시청자를 광고나 보고 물건이나 사는 바보소비자로 전락시키고 있다. <굿 나잇 앤 굿 럭>에서 CBS 언론인의 정치인의 무절제한 권력 남용에 대한 집요한 추적은 언론이 제대로 자신의 역할을 할 때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굿 나잇 앤 굿 럭>에서 머로우의 대사처럼 언론은 바보상자, 혹은 ‘저질 찌라지’라는 오명이 붙지 않도록 본연의 기능을 해야한다.
“TV는 지식을 전합니다. 깨달음도, 영감도 선사합니다. 허나 그것은 오직 최소한의 참고용으로 쓰일 때만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TV는 번쩍이는 바보상자에 불과합니다. 좋은 밤 되시고, 행복하십시오(Good night, and good luck.)”
<굿 나잇 앤 굿 럭>에서 머로우를 비롯한 언론인들은 연신 담배를 피워댄다. 요즘 SBS같은 방송사는 자체적으로 방송에 흡연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규제한다지만 1950년대의 CBS는 스튜디오에서는 물론이고 방송에서도 뉴스맨 머로우가 흡연하는 장면이 여과없이 그대로 방송된다. 그것도 매우 멋있게 말이다. 그리고, <굿 나잇 앤 굿 럭>의 한 씨퀸스에서는 그런 흡연 장면과 ‘켄트’(미국 담배 이름) 광고가 병치되기도 한다. 그 ‘켄트’ 광고가 방송내용의 일부인지 광고인지는 조금 지나서야 알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다. <굿 나잇 앤 굿 럭>에는 이렇게 광고에 관한 알레고리가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굿 나잇 앤 굿 럭>이 광고와 영화의 관계에 대한 발언을 하려는 것 같지는 않다. 광고와 언론(주로 방송)의 관계에 대해서 한마디 정도 발언을 하고 지나가려는 것으로 본인다. 언론이 설사 권력에 대해서 대항을 하더라도 자본에 대해서는 완벽히 저항을 할 수 없고, 그것은 자본측이 제공하는 광고를 매개로 한다는 것이다. 결룩 언론사도 기업이며 일정한 이윤을 창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종의 긴장관계가 발생한다. 그리고, 언론사의 질과 수준까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얼마전 진보 언론인 한겨레까지도 광고 검열 때문에 말썽이 있었던 적이 있다. 금속노조의 의견 광고에서 삼성이라는 문구를 뺀 것에서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독립 언론을 표방하는 한겨레가 광고자본에 휘둘릴 정도면 조·중·동같은 매체는 어느 정도일지 짐작해 볼 수도 있다. 거액의 광고를 유치하려고 적극적으로 기사고 지면 배치이고 친자본적으로 할 지도 모를 일이다.<굿 나잇 앤 굿 럭>에서 가장 인상적이였던 장면은 사장와 뉴스맨 머로우, 프로듀서 프랜들리의 삼자 대화 장면이다. 머로우와 매카시간의 공방후 매카시는 부정부패 혐의로 불신임된다. 그리고 사장의 방에서 삼자대화가 이뤄지는데 그 핵심은 검열에 관한 것이다. 머로우가 사장에게 사실상의 검열을 한 것이 아니냐 따지고, 사장(비교적 민주적이고 중립적인 경영자로 묘사됨)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오히려 머로우에게 ‘SEE IT NOW’ 방송과 관련하여 너도 빨갱이로 몰릴 것이 두려워 회피한 적이 있지않느냐? 누구나 (자기)검열을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다. 가위손(검열)이 5공시절처럼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시기는 지났다. 언론사에서도 공식적으로는 심의정도만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21세기에도 검열은 진행되고 있다. 언론인이건, 지식인이건, 평범한 회사원까지도 검열을 하고 산다. 공산주의와 사상에 관한 것, 성과 외설에 관한 것, 폭력과 준법에 관한 것, 서열과 위계에 관한 것, 죽음과 자살에 관한 것 등등. 그것은 공식적·비공식적인 압박 때문이기도 하며, 우리가 그간 사회인으로서 배워온 것들, 주입되어 온 것들 덕택이기도 하다. 둔감한 사람은 못 느끼지만 <굿 나잇 앤 굿 럭>의 머로우와 사장은 그런 안팎의 압력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그건 대화 뒤에 이어지는 알 수 없는 정적으로 나타난다.<굿 나잇 앤 굿 럭>은 확실히 별 다섯 개 짜리 고급 영화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상에도 6개 부문 노미네이트 되었다. 상이 작품의 질까지 증명하지는 않지만 <굿 나잇 앤 굿 럭>은 진지한 성찰을 할 기회를 제공해 준 좋은 영화였다. 영화는 감상 그 자체가 즉자적으로 주는 것 보다 생각하고 쓸 수 있게 열어주는 것들의 힘이 더욱 우월한 것 같다. 그럼 점에서 <굿 나잇 굿 럭>은 많은 꺼리를 제공하여 주었고 우수한 텍스트이다. 일전 deca님의 글방에서 <굿 나잇 앤 굿 럭>에 관한 것을 본 기억이 있다. 필넷과 인터넷 블로그들을 검색해 보니 <굿 나잇 앤 굿 럭>은 특히 블로거들이 관심을 두는 영화인 것 같다. <굿 나잇 앤 굿 럭>은 개봉관에서 흥행이 성공한 것은 아니고 소수매니아의 컬트도 아니며 오프닝 크레딧에 등장하는 ‘Warner independent presents’와는 달리 독립(Independent) 영화도 아니다. 하지만, 블로거들이 사랑하는 ‘블로거들의 영화’로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 같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굿 나잇 앤 굿 럭>이 광고와 영화의 관계에 대한 발언을 하려는 것 같지는 않다. 광고와 언론(주로 방송)의 관계에 대해서 한마디 정도 발언을 하고 지나가려는 것으로 본인다. 언론이 설사 권력에 대해서 대항을 하더라도 자본에 대해서는 완벽히 저항을 할 수 없고, 그것은 자본측이 제공하는 광고를 매개로 한다는 것이다. 결룩 언론사도 기업이며 일정한 이윤을 창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종의 긴장관계가 발생한다. 그리고, 언론사의 질과 수준까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얼마전 진보 언론인 한겨레까지도 광고 검열 때문에 말썽이 있었던 적이 있다. 금속노조의 의견 광고에서 삼성이라는 문구를 뺀 것에서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독립 언론을 표방하는 한겨레가 광고자본에 휘둘릴 정도면 조·중·동같은 매체는 어느 정도일지 짐작해 볼 수도 있다. 거액의 광고를 유치하려고 적극적으로 기사고 지면 배치이고 친자본적으로 할 지도 모를 일이다.<굿 나잇 앤 굿 럭>에서 가장 인상적이였던 장면은 사장와 뉴스맨 머로우, 프로듀서 프랜들리의 삼자 대화 장면이다. 머로우와 매카시간의 공방후 매카시는 부정부패 혐의로 불신임된다. 그리고 사장의 방에서 삼자대화가 이뤄지는데 그 핵심은 검열에 관한 것이다. 머로우가 사장에게 사실상의 검열을 한 것이 아니냐 따지고, 사장(비교적 민주적이고 중립적인 경영자로 묘사됨)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오히려 머로우에게 ‘SEE IT NOW’ 방송과 관련하여 너도 빨갱이로 몰릴 것이 두려워 회피한 적이 있지않느냐? 누구나 (자기)검열을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다. 가위손(검열)이 5공시절처럼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시기는 지났다. 언론사에서도 공식적으로는 심의정도만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21세기에도 검열은 진행되고 있다. 언론인이건, 지식인이건, 평범한 회사원까지도 검열을 하고 산다. 공산주의와 사상에 관한 것, 성과 외설에 관한 것, 폭력과 준법에 관한 것, 서열과 위계에 관한 것, 죽음과 자살에 관한 것 등등. 그것은 공식적·비공식적인 압박 때문이기도 하며, 우리가 그간 사회인으로서 배워온 것들, 주입되어 온 것들 덕택이기도 하다. 둔감한 사람은 못 느끼지만 <굿 나잇 앤 굿 럭>의 머로우와 사장은 그런 안팎의 압력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그건 대화 뒤에 이어지는 알 수 없는 정적으로 나타난다.<굿 나잇 앤 굿 럭>은 확실히 별 다섯 개 짜리 고급 영화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상에도 6개 부문 노미네이트 되었다. 상이 작품의 질까지 증명하지는 않지만 <굿 나잇 앤 굿 럭>은 진지한 성찰을 할 기회를 제공해 준 좋은 영화였다. 영화는 감상 그 자체가 즉자적으로 주는 것 보다 생각하고 쓸 수 있게 열어주는 것들의 힘이 더욱 우월한 것 같다. 그럼 점에서 <굿 나잇 굿 럭>은 많은 꺼리를 제공하여 주었고 우수한 텍스트이다. 일전 deca님의 글방에서 <굿 나잇 앤 굿 럭>에 관한 것을 본 기억이 있다. 필넷과 인터넷 블로그들을 검색해 보니 <굿 나잇 앤 굿 럭>은 특히 블로거들이 관심을 두는 영화인 것 같다. <굿 나잇 앤 굿 럭>은 개봉관에서 흥행이 성공한 것은 아니고 소수매니아의 컬트도 아니며 오프닝 크레딧에 등장하는 ‘Warner independent presents’와는 달리 독립(Independent) 영화도 아니다. 하지만, 블로거들이 사랑하는 ‘블로거들의 영화’로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 같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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