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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필진]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존재의 목적만 있다면!

등록 2006-12-19 14:49

그동안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와 같은 작품 속에서 ‘복수’에 관한 다양한 각도의 메커니즘을 보여주었던 박찬욱 감독의 새 작품,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기존의 작품들과 달리 아기자기한 스토리와 장면들을 구성했음에도 어쩐지 관객들의 반응이 영 신통치 않은 모양이다. 이 영화의 장르를 ‘로맨틱 코미디’라고 지정한 제작진의 탓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로 이해하면 안된다. 현대 시대의 모순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확히 꼬집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무대는 신세계 정신병원이다.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작화증 환자, 계속 먹어야 하는 환자, 모든 게 자기 탓이라고 생각해서 늘 예의를 갖추면서도 미안하다는 인사를 입에 달고 다니는 환자, 자신의 고운 목소리만 듣고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만 보고 살기 위해 거울을 놓질 않는 환자 등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곳이다. 주인공이라고 정신병 환자가 아니란 법은 없다. 자신이 싸이보그라고 생각하는 여자 ‘영군’과, 갖고 싶은 것을 훔치는 병에 걸린 남자 ‘일순’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영군은 자신이 싸이보그라고 생각하여 밥도 먹지 않고 건전지로 에너지를 충전한다. 사랑하는 할머니가 끌려간 병원의 하얀맨(의사)들을 죽이기 위한 명령을 받았다고 여기고 하얀맨들을 죽이는 상상을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상상 속에서 자신이 하얀맨들을 죽이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인즉슨, 하얀맨들에게도 할머니가 있을까봐 동정심이 든다는 것. 동정심에 사로잡힌 영군에게 아름답지만 기계적인 목소리가 ‘칠거지악’에 대해 공지한다.

동정심 금지, 설렘 금지, 죄책감 금지, 쓸데없는 망상 금지,

망설임 금지, 슬픔 금지, 감사하는 마음 금지.


이 7개의 덕목은 하얀맨들을 죽이는 목표에 달성하기 위해 반드시 버려야 하는 것들이다.

현대 시대는 사람들을 영군과 같은 병에 걸리게 하고 있다.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그것에 모순이 존재하든 하지 않든간에 동정심과 죄책감과 감사하는 마음을 버리고 살아가라고 여기 저기에서 말하고 있다. 바로 백화점 쇼윈도우의 명품 핸드백이, 광고 속의 호화로운 아파트가, “나쁜 여자가 되라”고 말하는 베스트셀러 도서들이 말이다.

영군은 잠자리에 들기 전 이런 말을 하고 잠이 들었다.

“아, 나도 존재의 목적 한 개만 있었으면 좋겠다.”

자신의 존재의 목적을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은 현대가 가지고 있는 큰 아픔이다. 존재의 목적을 모르고도 살아지긴 하지만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가 하늘과 땅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당연지사다. 물론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의 목적을 알기 위해 고민해도 결국 마땅한 결론을 내지 못하는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제 범상치 않은 일순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자. 일순은 현대의 이런 안타까운 허점을 위해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도둑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던, 그러나 반드시 그들에게 필요한 ‘존재의 목적’을 훔쳐주기 때문이다. 훔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몇 날 며칠이고 살펴본 후, 훔치고 싶은 것이 생길 때 훔친다. 그걸 ‘훔치심’이라고 말한다는 재미있는 말까지 한다. 훔치심이 생기면 어떤 이에게선 ‘목요일’을 훔치고, 어떤 이에게선 ‘할머니의 틀니’를 훔치고, 어떤 이에게선 ‘예의’를 훔치고, 어떤 이에게선 ‘동정심’을 훔친다. 이것들은 다 개인들에게 존재의 목적이 되었던 것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어떤 것이 사라지자마자 그것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다시 되찾았을 때 그것을 소중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일순은 도둑이라기 보다 가히 의사에 가깝다.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에 훔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게다가 충동적으로 훔치는 것도 아니고, 훔치기 위해 오랜 기간을 관찰했기 때문에 그 개인이 안고 있는 상처와 고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일순은 싸이보그라고 생각하는 영순이 통 밥을 먹지 않아 의사들이 고군분투했던 것을, 간단한 방법으로 밥을 먹이는 데 성공할 수 있던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 영화는 현대 문명이 앓고 있는 정신질환을 진단한 것이다. 그러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신병을 앓고 있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껴안고 있다. 잘못됐다고 말하지 않는 포용력으로 치료하고자 나선 것이다.

물론 영화 한 편으로 치료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또 영화로 치료를 받아서도 안된다. 영화는 자신과, 또 자신이 모르고 있던 자아를 연결해주는 매개체의 역할일 뿐이다. 이 영화를 보고 관객들이 영화에서 언급되었던 버려야 할 칠거지악이 원래는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덕목임을 깨달았다면, 또한 존재의 목적이 무엇인지 잠깐이라도 고민하게 되었다면, 영화를 잘 이해하고 본 것이다. 나는 아직 존재의 목적을 깨닫지 못했다. 다만 나의 존재의 목적이 ‘정의’이길 바란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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