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영화사 집
아버지의 이름으로..
1931년 제작된 독일영화 중에 프리츠 랑 감독의 걸작 <엠(M)>이 있다. 이 영화는 연쇄유괴범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독일에서 실제 있었던 아홉 어린이의 유괴범과 그 처벌에 관한 영화다. 이 영화가 영화사적인 걸작으로 자리매김하는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 중 한 가지는 그 결말때문이다. <엠>의 결말에서, 분노에 가득 찬 부모들은 유괴범을 잡지만 결코 사법시스템의 보호(?)아래 내놓지 않는다. 지하법정에서 임의로 재판을 하고 교수형을 집행해 버린다. 이 모티브는 몇 년 전 박찬욱 감독의 작품 <친절한 금자씨>에서도 차용된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최민식은 그가 행한 유괴범죄의 댓가로 부모들로부터 칼침을 한대씩 맞고 처형이 된다. 복수는 사회에서 금기시되지만 부모의 피끓는 한에 관한 한 허용되기도 하는 것 같다.
불행한 사람에게는 애정의,
불의에는 분노의 “감정이입”과 “공감”을… <그 놈, 목소리>에서 아버지 설경구는 자식의 유괴와 피살에도 결국 아무 것도 하지를 못한다. 오히려 ‘그 놈’에게 2억이나 갖다받치고 말 뿐이다. 어머니 김남주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성경을 박박 찢어발기지만, 실상 그녀는 ‘그 놈’의 비열한 두뇌플레이에 농락당했을 뿐이다. 그러면 이 가련한 부모에게 우리는 무어라고 해야할까? 측은한 동정의 말만을 건네야 할까? 아니면, 내 자식은 불행한 사고가 없기를 기도해야 할까? 다니엘 골먼의 최근 저서 을 보면 “감정이입”과 “공감”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 등장하고 있다. 난 다니엘 골먼의 이 이야기가 헛도는 CD의 노랫가락이 아니길 바란다. 사회적으로 타인의 어려움에 대해서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여 함께 눈물 흘리고 함께 공감하기를 바란다. 마찬가지로,사회적 차원으로나 개인적인 차원으로나 불의에 대해서는 함께 노여워 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유괴는 범죄 중에서도 가장 저열한 형태의 범죄다. 자기방어 능력도 없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몸값을 요구하는 행위란 가장 비인간적인 행위이다. 때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처럼 살인에 대해서도 피해자의 가족이 용서와 관용을 베풀기도 하며, 우리의 사법시스템은 그들에게도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를 주지만 인간의 감정은 결코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그 놈들’
다시 <그 놈, 목소리>로 돌아가면, 불현듯 진정 ‘그 놈’은 누굴까하는 생각이 든다. <괴물>에서 ‘괴물’이 일그러진 괴수에만 한정되지 않았던 것 처럼, ‘그 놈’도 유괴범 ‘그 놈’에게만 한정되지 않음은 영화의 사회적,정치적 역할과 기능을 생각한다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그 놈, 목소리>의 도입부, 1991년의 평화로운 가정에서 텔레비전이 켜져있고 앵커인 아버지 설경구는 노태우전대통령의 ‘범죄와의 전쟁’ 선포보도를 한다. 그는 물론 예의 비판적인 멘트를 날린다. 마치, ‘그 놈’의 뒤틀린 심성을 건드리기라도 하듯이.그리곤, <그 놈,목소리>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상징적인’ 처벌을 당한다. 금지옥엽 같은 아들을 유괴당하고, 유괴당한 지 하루만에 교살당하고, 유괴당한 후 오랫동안 계속 지옥 같은 유린과 희롱을 당한다. ‘그 놈’에게서 말이다.1991년은 군부정권의 칼날이 시퍼런 엄혹한 시절이며, 지식인조차 아직은 말을 자유롭게 하기 어려운 시대였다(지금도 사안에 따라서는 마찬가지지만). 그런 시대에 ‘대타자(라캉의 정신분석학 용어)’에게 비판적인 말을 하는 것은 (상징적)처벌을 감수해야만 하는 사건이다. 현실세계에서 벌어진 일은 어쩌면 ‘사소한’ 유괴사건일 지 모른다. 하지만 그 사건에는 군부정권의 비열성과 잔인함이 의미론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나 함축되어 있다. 더구나, 김진표 감독의 연출이 유괴사건을 수수방관하는 듯한 경찰의 무능력을 집요하게 폭로하는 데에는 이런 ‘정치사회학적 상상력’의 가동이 진정 불가피할지 모른다.
’상징적 처벌’에 대한 ‘상징적 처형’의 화답을정말, 글로써, 오라를 만들어 매달아 버리고 싶었다. 프리츠 랑의 지하법정에서처럼 즉결심판을 해 버리고 싶었다. 이상호군을 유괴한 ‘그 놈’에 대해서 그렇고, 광주에서, 군대에서, 구로구청에서, 충무로에서, 보안사에서, 안기부에서 수 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영혼을 유린한 ‘그 놈들’에 대해서 그렇다. 많이 하는 말로 ‘용서는 하지만 잊지는 말자’는 이야기가 있다. 글쎄, 기억하는데 용서할 수 있을까? 그 말에서 정말 공감하는 부분은 ‘기억’에 관한 부분뿐이다.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는 것만이 ‘그 놈’을 잡고 이상호군을 부활시키는 첩경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우리 사회의 다른 더 큰 ‘그 놈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끝이 나면 당시 현장에서 녹음되었던 ‘그 놈’의 목소리와 현상포스터, 인상착의가 나온다. 설사 사람이 망각하는 것도 필름은 다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불의에는 분노의 “감정이입”과 “공감”을… <그 놈, 목소리>에서 아버지 설경구는 자식의 유괴와 피살에도 결국 아무 것도 하지를 못한다. 오히려 ‘그 놈’에게 2억이나 갖다받치고 말 뿐이다. 어머니 김남주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성경을 박박 찢어발기지만, 실상 그녀는 ‘그 놈’의 비열한 두뇌플레이에 농락당했을 뿐이다. 그러면 이 가련한 부모에게 우리는 무어라고 해야할까? 측은한 동정의 말만을 건네야 할까? 아니면, 내 자식은 불행한 사고가 없기를 기도해야 할까? 다니엘 골먼의 최근 저서 을 보면 “감정이입”과 “공감”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 등장하고 있다. 난 다니엘 골먼의 이 이야기가 헛도는 CD의 노랫가락이 아니길 바란다. 사회적으로 타인의 어려움에 대해서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여 함께 눈물 흘리고 함께 공감하기를 바란다. 마찬가지로,사회적 차원으로나 개인적인 차원으로나 불의에 대해서는 함께 노여워 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유괴는 범죄 중에서도 가장 저열한 형태의 범죄다. 자기방어 능력도 없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몸값을 요구하는 행위란 가장 비인간적인 행위이다. 때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처럼 살인에 대해서도 피해자의 가족이 용서와 관용을 베풀기도 하며, 우리의 사법시스템은 그들에게도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를 주지만 인간의 감정은 결코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거리를 질주하는 아버지, 아버지는 이미 상호의 죽음의 짐작한다. 하지만 한가닥 희망을 걸기라도 했는지 약속장소로 내달린다. ⓒ 영화사 집
벌거벗긴 형사. 에서의 경찰은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다. ⓒ 영화사 집
영화가 끝이 나면 당시 현장에서 녹음되었던 ‘그 놈’의 목소리와 현상포스터, 인상착의가 나온다. 설사 사람이 망각하는 것도 필름은 다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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