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피우기 좋은 날은 언제?
<바람피기 좋은 날>은 불륜남녀에게 불친절한 영화다. 바람피우기 좋은 날이 언제인지 알려주지도 않을뿐더러 불륜 현장이 적발되는 가슴 철렁한 장면까지 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렵사리 파트너를 섭외하고 지난한 줄다리기의 시간 끝에 드디어 결행의 그 날을 택일하려는 남녀에게 이 영화는 적절한 선택이 아니다. 또한 한참 불 타오르는 현재 진행형 커플이라면 이 영화의 밋밋한 수위에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다른 대부분의 영화가 그렇 듯 영화를 통해서나 일탈을 꿈꾸는, 현실에서는 건실하기 그지없는 대한민국 '보통' 남녀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영화는 바람피우기 좋은 날이 언제인지 구체적 정보를 제공할 의무를 면한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바람피우기 좋은 날은 언제일까? 우리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면 술 마시기 좋은 날이라고 말한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을 보면 소풍가기 좋은 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선선한 바람이 불면 운동하기 좋은 날이고, 따뜻한 주말 오후는 데이트하기 좋은 날이다. 그러고 보니 일하기 좋은 날, 공부하기 좋은 날이라는 말은 잘 하지 않는 것 같다. 좀 더 구체적인 정황을 보자. 아침에 출근하는데 회사 정문에서 직장상사를 만났다. 그가 빙긋이 웃으며 '오늘은 참 노동하기 좋은 날이죠?'라고 인사를 건낸다면, 놀리는건가 잠시 당황했다가 '사표 쓰기 좋은 날'이라고 맞받아치고 싶을 것이다. 일하기 좋은 날, 공부하기 좋은 날은 어색하다. 그런 날은 따로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것이 일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축구하기 좋은 날, 연날리기 좋은 날, 술 마시기 좋은 날은 어색하지 않다. '~하기 좋은 날'은 일상을 벗어난 여흥이나 놀이의 영역에 어울리는 표현인 것이다. 결국 <바람피기 좋은 날>이라는 제목은 이 영화가 바람을 보는 시각을 단적으로 설명한다. 이 영화에서 바람피우기는 잠시 일상을 벗어나 즐기는 여흥이나 놀이에 불과한 것이다. 바람이 심각한 치정이라면 바람피우기 좋은 날 고를 여유 따위는 없다. 배우자의 눈길을 피하기 쉬운 날이 바람피우기 좋은 날이다. 하지만 이 바람이 단순한 놀이라면 바람피우기 좋은 날은 기분따라 마음따라 천차만별일 것이다.
놀이로서 바람피우기 이슬(김혜수)와 작은새(윤진서)는 인터넷 채팅을 통해서 각각 대학생(이민기)와 여우두마리(이종혁)를 만나 남편 몰래 바람을 피우기 시작한다. 이슬은 과감하게, 작은새 은근히 욕망을 채워 나간다. 하지만 유부녀인 이슬과 작은새가 왜 바람을 피우는지 영화는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그들은 특별히 불행하지도, 특별히 억압 받지도 않는다. 이슬과 작은새를 불륜으로 내몬 원인을 찾으려는 관객에게 영화는 능청스럽게 이유 따위는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바람피우기는 친구의 부러움을 사는 놀이일 뿐이다. 따라서 영화는 바람피우기와 사랑의 선을 명확히 긋고 있다. 이슬은, 자신은 바람을 피웠을 뿐이지만 남편은 한 때 다른 여자를 '사랑'했다고 항변하고, 사랑을 느낀다는 대학생을 비웃는다. 또한 여우두마리에 사랑을 느끼는 작은새는 버림을 받기도 한다. 바람피우기가 놀이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개입되서는 안되는 것이다. 영화는 이렇게 놀이로서 바람피우기를 발칙하지만 유쾌하게 그려 나간다. 하지만 이들의 가벼운 인식과 세상의 무거운 입장 사이의 충돌은 마치 가스 불 위의 압력밥솥처럼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문제였다. 결국 이들의 놀이는 충돌의 상처만 남기고 끝을 맺는다. 갑자기 친해져서 나란히 병원에 입원한 이슬과 작은새에게 자유를 위하 연대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들은 단지 같이 놀기 좋은 친구가 되었을 뿐이다. 불륜이 영화의 단골 소재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국영화에서도 <자유부인>부터 <결혼은 미친 짓이다>, <바람난 가족>, 그리고 이 영화 <바람피기 좋은 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불륜 영화가 만들어졌다. 초기의 불륜 영화는 유교적 가치관에 반한다는 이유로 사회적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이후의 불륜 영화는 남성 관객의 시각에서 여성이 몸을 대상화 한다는 이유로 비판 받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의 불륜 영화는 오늘날의 성풍속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고 평가되기도 했으며 억압받는 여성 현실에 대한 저항이라고 상찬받기도 했다. 불륜이라는 동일한 소재에 대한 시대의 인식과 창작자의 입장 차이에 따라 수없이 많은 분석의 전례가 있는 것이다. 결국 영화에서 불륜은 더이상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이제 와 불륜을 놀이라고 인식한다고 해서 미풍양속과 건전한 가치관을 해한다고 공박하는 것은 50여년전 <자유부인> 논쟁으로 돌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관심을 가질 것은 불륜이 놀이가 되는 현재이다. 바람피우기 좋은 날이 따로 있나? 바람피우기를 놀이로 보는 영화를 전통적 가치관에 대한 도전으로 보는 것은 곤란하다. 놀이는 놀이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골프도 아니고, 쇼핑도 아닌, 가장 원초적이고 자극적인 놀이를 선택하는가? 당연히 가장 재미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미만큼이나 위험부담도 크다. 재미말고 다른 이유는 없을까? 이슬은 즐겁게 요리를 하지만 먹지 못할 음식을 만들고 작은새는 이야기를 듣는 것을 즐기지만 얘기해줄 사람이 없다. 이들은 모두 소통에 있어서 어느 정도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불륜과의 인과관계를 찾는 것은 무리다. 영화는 단지, 우리가 한 번은 상상했을 재미있는 놀이를 즐기는 대담한 주인공들을 통해 우리에게 일탈을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코믹한 상황과 대사를 통해 이것이 전혀 심각하지 않은, 놀이에 불과함을 계속 강조한다. 이렇게 규정된 틀을 전복하고 심각한 도덕률조차 놀이로 버무리는 것은 대중문화 본래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 전통적 가치관에대한 희화화는 대중문화의 오랜 테제였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경쾌한 율동에 맞춰 일군의 아줌마들이 <바람아 멈추어다오>를 부르는 장면은 멈추지 않을 바람에 대한 반어적 표현이다. 외도만이 바람은 아닐 것이다. 또 다른 즐거움을 찾아나서는 바람이기를 기대해본다. 바람피우기 좋은 날은 따로 없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놀이로서 바람피우기 이슬(김혜수)와 작은새(윤진서)는 인터넷 채팅을 통해서 각각 대학생(이민기)와 여우두마리(이종혁)를 만나 남편 몰래 바람을 피우기 시작한다. 이슬은 과감하게, 작은새 은근히 욕망을 채워 나간다. 하지만 유부녀인 이슬과 작은새가 왜 바람을 피우는지 영화는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그들은 특별히 불행하지도, 특별히 억압 받지도 않는다. 이슬과 작은새를 불륜으로 내몬 원인을 찾으려는 관객에게 영화는 능청스럽게 이유 따위는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바람피우기는 친구의 부러움을 사는 놀이일 뿐이다. 따라서 영화는 바람피우기와 사랑의 선을 명확히 긋고 있다. 이슬은, 자신은 바람을 피웠을 뿐이지만 남편은 한 때 다른 여자를 '사랑'했다고 항변하고, 사랑을 느낀다는 대학생을 비웃는다. 또한 여우두마리에 사랑을 느끼는 작은새는 버림을 받기도 한다. 바람피우기가 놀이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개입되서는 안되는 것이다. 영화는 이렇게 놀이로서 바람피우기를 발칙하지만 유쾌하게 그려 나간다. 하지만 이들의 가벼운 인식과 세상의 무거운 입장 사이의 충돌은 마치 가스 불 위의 압력밥솥처럼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문제였다. 결국 이들의 놀이는 충돌의 상처만 남기고 끝을 맺는다. 갑자기 친해져서 나란히 병원에 입원한 이슬과 작은새에게 자유를 위하 연대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들은 단지 같이 놀기 좋은 친구가 되었을 뿐이다. 불륜이 영화의 단골 소재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국영화에서도 <자유부인>부터 <결혼은 미친 짓이다>, <바람난 가족>, 그리고 이 영화 <바람피기 좋은 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불륜 영화가 만들어졌다. 초기의 불륜 영화는 유교적 가치관에 반한다는 이유로 사회적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이후의 불륜 영화는 남성 관객의 시각에서 여성이 몸을 대상화 한다는 이유로 비판 받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의 불륜 영화는 오늘날의 성풍속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고 평가되기도 했으며 억압받는 여성 현실에 대한 저항이라고 상찬받기도 했다. 불륜이라는 동일한 소재에 대한 시대의 인식과 창작자의 입장 차이에 따라 수없이 많은 분석의 전례가 있는 것이다. 결국 영화에서 불륜은 더이상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이제 와 불륜을 놀이라고 인식한다고 해서 미풍양속과 건전한 가치관을 해한다고 공박하는 것은 50여년전 <자유부인> 논쟁으로 돌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관심을 가질 것은 불륜이 놀이가 되는 현재이다. 바람피우기 좋은 날이 따로 있나? 바람피우기를 놀이로 보는 영화를 전통적 가치관에 대한 도전으로 보는 것은 곤란하다. 놀이는 놀이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골프도 아니고, 쇼핑도 아닌, 가장 원초적이고 자극적인 놀이를 선택하는가? 당연히 가장 재미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미만큼이나 위험부담도 크다. 재미말고 다른 이유는 없을까? 이슬은 즐겁게 요리를 하지만 먹지 못할 음식을 만들고 작은새는 이야기를 듣는 것을 즐기지만 얘기해줄 사람이 없다. 이들은 모두 소통에 있어서 어느 정도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불륜과의 인과관계를 찾는 것은 무리다. 영화는 단지, 우리가 한 번은 상상했을 재미있는 놀이를 즐기는 대담한 주인공들을 통해 우리에게 일탈을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코믹한 상황과 대사를 통해 이것이 전혀 심각하지 않은, 놀이에 불과함을 계속 강조한다. 이렇게 규정된 틀을 전복하고 심각한 도덕률조차 놀이로 버무리는 것은 대중문화 본래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 전통적 가치관에대한 희화화는 대중문화의 오랜 테제였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경쾌한 율동에 맞춰 일군의 아줌마들이 <바람아 멈추어다오>를 부르는 장면은 멈추지 않을 바람에 대한 반어적 표현이다. 외도만이 바람은 아닐 것이다. 또 다른 즐거움을 찾아나서는 바람이기를 기대해본다. 바람피우기 좋은 날은 따로 없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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